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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경제

제4화 부치지 못한 편지 같은 통장

by 조르바문 2026.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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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눈이 떠집니다.

옥탑방은 고요합니다. 바람 소리만 들립니다. 나는 잠시 그 고요함 속에 누워있습니다.

오늘도 살아있구나.

그 생각 하나가 가슴을 채웁니다.


숨겨둔 통장

옥탑방 한구석에 통장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나만 압니다.

가끔 혼자 꺼내어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숫자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크지 않습니다. 남들이 보면 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숫자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새벽 4시, 청계천 도로 위에서

4시에 집을 나섭니다.

청계천 도로에 빗자루를 밉니다.

손이 시립니다. 허리가 뻐근합니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혼자 서걱서걱 빗자루 소리만 납니다.

그 시간에 나는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빗자루질 한 번이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땀방울 하나가 통장 속에 쌓이는 사랑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누가 봐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걷고 있을 뿐입니다.

땀방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이 통장은 편지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이들 곁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학교 운동회에 가지 못했습니다. 생일상을 차려주지 못했습니다. 힘들다고 전화가 와도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그 미안함들이 가슴 속에 쌓였습니다.

말로는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통장에 씁니다.

한 줄 한 줄. 한 달 한 달.

미안하다.

사랑한다.

아비는 여기 있다.


그날을 위해

언젠가 그날이 올 것입니다.

아들이 결혼하는 날. 딸이 웨딩드레스를 입는 날.

나는 그날 이 통장을 꺼낼 것입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에 담을 것입니다.

말은 못 할 것 같습니다. 눈물이 먼저 나올 테니까요.

하지만 그 봉투가 말해줄 것입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4시부터 청계천 도로를 쓸던 아비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버텨낸 겨울 새벽들이.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혼자 빗자루를 밀며 너희를 생각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전부 다 말해줄 것입니다.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옥탑방 창문 너머로 서울의 불빛이 반짝입니다.

통장을 다시 접어 제자리에 놓습니다.

내일도 새벽 3시에 눈이 떠질 것입니다. 4시엔 청계천 도로로 나갈 것입니다. 빗자루를 들 것입니다.

그리고 통장에 한 줄이 더 생길 것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 속에.

사랑한다는 고백의 다른 이름으로.

나는 오늘도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닿을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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