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체 글10

[카레이스키 유랑사 010회] 소련의 아들, 조선의 핏줄 1960년대 [카레이스키 유랑사 010회] 소련의 아들, 조선의 핏줄 1960년대 바이라인: 조르바문 잊혀지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은 다르다. 잊혀지는 것은 시간이 만든다. 세월이 흐르면 기억은 흐려진다. 어제의 일이 일주일이 지나면 흐릿해지고, 일 년이 지나면 윤곽만 남고, 십 년이 지나면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사람의 탓이 아니다. 시간의 탓이다. 그러나 잃어버리는 것은 다르다. 잃어버리는 것은 스스로 놓아버리는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의식적으로 내려놓는 것이다. 시간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버리는 것이다. 문빅토르는 잊혀지는 것과 싸웠다. 그러나 잃어버리지는 않았다.소련 학교에서 러시아어로 레닌을 배우고 마르크스를 배우는 동안, 집에서는 아버지 문인수가 조선말로 .. 2026. 6. 10.
[카레이스키 유랑사 009회]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세상 1945년 [카레이스키 유랑사 009회]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세상 1945년 바이라인: 조르바문 사람은 두 개의 언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두 개의 영혼을 가질 수는 없다. 밖에서는 러시아말을 했다. 소련 체제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러시아말을 해야 했다. 콜호스에서 일할 때도, 관헌들을 만날 때도, 시장에 나갈 때도 러시아말이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달랐다. 문을 닫으면 달랐다. 순이가 된장국을 끓이고, 문인수가 아들에게 말을 가르칠 때, 그 말은 언제나 조선말이었다. 두 개의 언어. 그러나 영혼은 하나였다. 카레이스키의 영혼이었다. 1945년 봄이었다.카자흐스탄에 온 지 여덟 해가 지났다.문인수는 서른세 살이 되어 있었다. 카자흐스탄의 태양이 얼굴을 그을렸다. 손은 더 거칠어졌다. 허리도 조금 굽기 시.. 2026. 6. 10.
[카레이스키 유랑사 008회] 붉은 땅에 볍씨를 심다, 문인수의 봄 1938년 [카레이스키 유랑사 008회] 붉은 땅에 볍씨를 심다, 문인수의 봄 1938년 바이라인: 조르바문 살아있다는 것은 심는다는 것이다. 거두지 못할 수도 있다. 심은 것이 자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심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문장손이 두만강을 건너며 품에 안고 온 볍씨가 연해주 돌밭에서 황금빛 벼가 되었듯, 이제 문인수가 그 씨앗을 카자흐스탄의 붉은 황무지에 심어야 했다.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아니, 유언이기 이전에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1938년 봄이 왔다.카자흐스탄의 봄은 조선의 봄과 달랐다. 연해주의 봄과도 달랐다. 눈이 녹는 것이 아니라 얼었던 땅이 그냥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바람이 달라져 있었다. 어제까지 칼날 같던 바람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2026. 6. 10.
[카레이스키 유랑사 007회] 붉은 황무지, 카자흐스탄의 첫 겨울 1937년 [카레이스키 유랑사 007회] 붉은 황무지, 카자흐스탄의 첫겨울 1937년 바이라인: 조르바문 사람은 던져진 곳에서 산다. 선택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어디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듯, 어디로 던져질지도 선택할 수 없다. 스탈린의 명령서 한 장이 카레이스키를 중앙아시아의 붉은 황무지로 던졌다.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던져진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그것만큼은 선택할 수 있었다. 문인수는 그것을 알았다. 아버지 문장손에게서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열차가 멈춘 것은 스물다섯 날째 되던 날이었다.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지 거의 한 달이었다. 화물칸 안에서 한 달을 보냈다. 어둠 속에서 한 달을 버텼다. 처음 며칠은 사람들이 말을 했다. 어디로 가는지, 거기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 2026. 6. 10.
[카레이스키 유랑사 006회] 스탈린의 발소리, 연해주에 드리우다 1937년 [카레이스키 유랑사 006회] 스탈린의 발소리, 연해주에 드리우다 1937년 바이라인: 조르바문 권력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봄이 오는 것은 안다. 겨울이 길어도 언젠가 눈이 녹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권력의 발소리는 다르다.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쓸어간다. 1937년 연해주의 가을이 그랬다. 문장손이 평생을 일궈온 것들이, 문인수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이, 단 한 장의 명령서로 산산이 부서지던 그 가을이.1930년대 연해주는 조용하지 않았다. 소련이 들어선 이후 세상이 달라졌다. 차르가 사라지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뒤, 연해주의 조선 사람들은 새 체제에 적응해야 했다. 집단농장, 콜호스가 생겼다. 개인 땅은 없어졌다. 문장손이 평생 돌을 골라내.. 2026. 6. 10.
[카레이스키 유랑사 005회] 아들이 태어나다, 문인수의 첫 울음 1912년 [카레이스키 유랑사 005회] 아들이 태어나다, 문인수의 첫울음 1912년 바이라인: 조르바문씨앗은 혼자 살지 않는다.땅에 뿌려진 씨앗은 싹을 틔우고, 그 싹은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에서 다시 씨앗이 맺힌다. 문장손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땅에 볍씨를 심던 날, 그는 쌀만 심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다음을 심은 것이었다. 자신이 다하고 나서도 이어질 무언가를 심은 것이었다. 그것이 아들이었다. 그것이 카레이스키 2대의 시작이었다. 1911년 봄이었다.신한촌에 새 식구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그해 봄 장터에서였다. 함경도 성진 출신 처녀가 오빠를 따라 연해주로 건너왔다는 것이었다. 이름은 박순이. 스물한 살. 오빠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서 막노동을 했고, 순이는 신한촌 아낙네들의 빨래와 바.. 2026. 5. 2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