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8 [카레이스키 유랑사 028회]볍씨를 내려놓다, 1903년 봄 연해주 [카레이스키 유랑사 028회] 볍씨를 내려놓다, 1903년 봄 연해주 바이라인: 조르바문 씨앗을 심는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다. 이 씨앗이 이 흙에서 자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수확의 날까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이 없으면 심지 못한다. 절망한 사람은 씨앗을 심지 않는다. 오직 내일을 믿는 사람만이 오늘 씨앗을 심는다. 문장손이 단천에서 두만강을 건너며 품에 안고 온 볍씨를 처음으로 연해주의 흙에 내려놓은 것은 1903년 봄이었다. 신한촌에 온 지 거의 일 년이 지난 때였다. 일 년 동안 돌을 골라내고 땅을 뒤집어 만든 논이었다. 그 논에 볍씨를 처음 심던 날, 문장손의 손이 떨렸다. 두만강을 건너던 날도 떨지 않았던 손이. 최서방 앞에서 .. 2026. 9. 5. [카레이스키 유랑사 027회]불씨, 1902년 연해주 신한촌의 밤 [카레이스키 유랑사 027회] 불씨, 1902년 연해주 신한촌의 밤 바이라인: 조르바문 불씨는 바람에 꺼지지 않는다. 오히려 바람이 불씨를 키운다. 아무리 센 바람이 불어도 불씨가 살아있는 한 불은 꺼지지 않는다. 꺼진 것처럼 보여도 재 속에 살아있다. 손으로 재를 헤쳐보면 거기 붉게 남아있다. 그 불씨에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얹으면 다시 살아난다. 1902년 연해주 신한촌에 그런 불씨가 있었다. 조선을 잃지 않겠다는 불씨였다. 관아의 수탈을 피해 건너온 사람도 있었고, 굶주림을 피해 건너온 사람도 있었고, 독립의 뜻을 품고 건너온 사람도 있었다. 사연은 달랐다. 그러나 가슴 안에 그 불씨 하나는 같았다. 조선을 잃지 않겠다는 것. 빼앗겨도 잊지 않겠다는 것. 그 불씨가 신한촌의 밤마다 모닥불 앞에서 살.. 2026. 9. 5. [카레이스키 유랑사 026회]돌밭과 모닥불, 1902년 연해주 신한촌 [카레이스키 유랑사 026회] 돌밭과 모닥불, 1902년 연해주 신한촌 바이라인: 조르바문 손바닥이 말을 한다. 말을 못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다. 물집이 잡히면 이만큼 버텼다고 말한다. 물집이 터지면 조금 더 가야 한다고 말한다. 굳은살이 생기면 이제 여기가 내 땅이라고 말한다. 문장손의 손바닥이 그 말들을 하기 시작한 것은 신한촌에 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최서방이 내준 땅에 처음 삽을 들이밀던 그날이었다. 쇠 삽날이 돌에 부딪혀 튕겨나왔다. 손이 저렸다. 그러나 다시 들었다. 또 튕겨났다. 그래도 다시 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터졌다. 붉은 살이 드러났다. 그 위에 다시 물집이 잡혔다. 그것이 카레이스키의 시작이었다. 말이 아니라 .. 2026. 9. 5. [카레이스키 유랑사 025회]조선말 소리, 1902년 연해주 신한촌 [카레이스키 유랑사 025회] 조선말 소리, 1902년 연해주 신한촌 바이라인: 조르바문 사람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고향의 냄새가 아니다. 고향의 소리다. 어머니가 아궁이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소리. 아버지가 마당에서 기침을 하던 소리. 동생들이 골목에서 뛰어노는 소리. 그 소리들은 살아있을 때는 그냥 공기처럼 있었다.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떠나고 나면 달라진다. 없어지고 나면 달라진다. 그때서야 그 소리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안다. 문장손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땅에서 사흘을 걸어 신한촌 어귀에 섰을 때, 처음 들려온 것이 조선말 소리였다. 그 순간 문장손은 알았다.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그 소리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그리워하는 줄도 몰랐던 것을 잃고 나서야 아는 것처럼, 그 .. 2026. 9. 5. [카레이스키 유랑사 024회]어머니의 손, 1902년 두만강 새벽 [카레이스키 유랑사 024회] 어머니의 손, 1902년 두만강 새벽 바이라인: 조르바문 어머니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조선의 사내는 어머니 손을 잡지 않는다. 열 살이 넘으면 안 잡는다. 그것이 예의였다. 그것이 법도였다. 그러나 두만강 갈대밭에 쭈그려 앉아 동이 트기를 기다리는 이 새벽, 문장손은 그 법도가 원망스러웠다. 어머니 손을 한 번만 더 잡을 수 있었다면. 그 차갑고 거칠고 굳은살 박인 손을 한 번만 더 잡을 수 있었다면. 그러나 이미 늦었다. 단천이 저 산 너머에 있었다. 어머니가 저 산 너머에 있었다. 사립문을 닫고 나올 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은 것이 이제 와서 이렇게 아팠다. 문장손은 손안의 놋쇠 숟가락을 더 꽉 쥐었다. 이것이 어머니의 손 대.. 2026. 9. 5. [카레이스키 유랑사 023회]다시 두만강으로, 1902년 새벽 [카레이스키 유랑사 023회] 다시 두만강으로, 1902년 새벽 바이라인: 조르바문 1995년 여름, 안산. 드미트리는 그날 밤 아버지 답장을 읽고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가의 두 화분을 바라보았다. 드미트리의 볍씨와 나디아의 볍씨가 여름 달빛 아래 나란히 서 있었다. 초록빛이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살아있다는 것이 보였다. 드미트리는 그 화분을 바라보다가 놋쇠 숟가락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웠다. 언제나 차가웠다. 그러나 손안에서 곧 따뜻해질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드미트리는 그 숟가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어디서 왔는지. 아버지가 말해주었다. 할아버지가 말해주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그것을 이야기로만 알았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알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아.. 2026. 9. 5. 이전 1 2 3 4 5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