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이스키 유랑사 023회]
다시 두만강으로, 1902년 새벽
바이라인: 조르바문

1995년 여름, 안산.
드미트리는 그날 밤 아버지 답장을 읽고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가의 두 화분을 바라보았다. 드미트리의 볍씨와 나디아의 볍씨가 여름 달빛 아래 나란히 서 있었다. 초록빛이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살아있다는 것이 보였다.
드미트리는 그 화분을 바라보다가 놋쇠 숟가락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웠다. 언제나 차가웠다. 그러나 손안에서 곧 따뜻해질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드미트리는 그 숟가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어디서 왔는지. 아버지가 말해주었다. 할아버지가 말해주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그것을 이야기로만 알았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알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아직 다 닿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 숟가락을 처음 쥔 손은 어떤 손이었을까.
함경도 단천의 흙을 만지던 손이었을 것이었다. 두만강의 차가운 강물 속에서 떨던 손이었을 것이었다. 연해주의 돌밭에서 삽을 들던 손이었을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눈을 감았다.
그 손을 느끼고 싶었다. 그 새벽을 느끼고 싶었다. 1902년 두만강의 그 새벽을.
1902년 4월, 함경도 단천.
그날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문장손은 눈을 떴다.
방 안이 어두웠다.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등을 파고들었다. 옆에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고르고 낮은 숨소리였다. 자는 척하는 것인지 정말 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알았다. 아니, 문장손은 알았다. 어머니가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들이 일어나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문장손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었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쌌다. 4월이었지만 함경도의 새벽은 아직 겨울 냄새를 품고 있었다. 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차가운 흙바닥이었다. 신발을 찾아 신었다. 낡고 닳아서 발가락이 비칠 것 같은 신발이었다.
보자기를 들었다.
어젯밤 싸두었던 보자기였다. 볍씨 봉지, 놋쇠 숟가락, 아버지가 남기고 간 손바닥만 한 성경책. 그것이 전부였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를 보자기 하나에 싸고 나니 오히려 가벼웠다. 가볍다는 것이 슬픈 것인지 자유로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방문 앞에 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윤곽이 보였다. 누워 있었다. 등을 보이고 누워 있었다. 그 등이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문장손은 입을 열었다.
"어머니."
대답이 없었다.
"갑니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등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문장손은 돌아서서 방문을 열었다.
마당으로 나섰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쳤다. 하늘을 보았다. 별이 있었다. 단천의 새벽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이 별들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두만강을 건너면 이 별들이 달라 보일까. 아니면 같아 보일까.
사립문을 열었다.
낡은 경첩이 소리를 냈다.
문장손은 그 소리를 들으며 멈추었다. 이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이 문을 다시 열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으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걸었다.
단천의 새벽 길을 걸었다.
안산, 1995년 여름.
드미트리는 눈을 떴다.
방 안이었다. 안산의 고시원 방이었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손을 보았다. 놋쇠 숟가락이 손안에 있었다. 잠들면서도 쥐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뜻했다. 밤새 손안에서 체온을 머금은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그 온기를 느끼며 생각했다.
증조할아버지가 사립문을 열고 나가던 그 새벽. 단천의 별빛 아래 걷던 그 발걸음. 그것이 90년 전의 일인데 지금 이 순간 이상하게 생생했다. 마치 어젯밤 꿈에서 본 것처럼 생생했다.
화분을 보았다. 두 싹이 새벽빛 안에서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일어났다. 물을 조금 주었다. 드미트리의 화분에, 나디아의 화분에. 물이 흙 안으로 스며들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었다.
매일 물을 주는 것이었다. 서두르지 않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것이었다.
1902년 4월, 함경도 단천에서 두만강까지 가는 길.
사흘이었다.
첫날은 마을길을 걸었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큰길을 피했다. 산길로 돌아갔다. 발밑이 미끄러웠다. 밤새 이슬이 내려 풀이 젖어 있었다. 두 번 미끄러졌다. 무릎을 긁혔다. 닦지 않고 계속 걸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첫 번째 고개를 넘었다.
고개 위에서 단천 쪽을 돌아보았다.
마을이 보였다. 저 마을 안에 어머니가 있었다. 낮잠을 주무실 것이었다. 아니면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실 것이었다. 두 동생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릴 것이었다. 아버지 무덤 위에 봄풀이 돋아날 것이었다.
문장손은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면 발이 돌아갈 것이었다.
고개를 돌렸다. 북쪽을 보았다. 두만강은 저 너머에 있었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 있었다. 사흘을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걸었다.
발이 앞으로 나갔다. 머리는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발은 앞으로 나갔다. 발이 머리보다 용감했다.
둘째 날은 비가 왔다.
산길이 진흙이 되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이 빠졌다. 신발 안으로 진흙이 스며들었다. 발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걸었다.
비 속에서 혼자 걷는 것이 처음에는 무서웠다.
산짐승이 나올까봐 무서웠다. 관아 포졸들에게 들킬까봐 무서웠다. 두만강을 건너다 물살에 휩쓸릴까봐 무서웠다. 두만강을 건너도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일까봐 무서웠다.
무서운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걸으면 무서움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한 걸음 걸으면 조금 줄었다. 두 걸음 걸으면 조금 더 줄었다. 걷는 것이 무서움을 이기는 방법이었다.
산 중턱 바위 아래서 잠을 잤다.
비는 그쳤지만 바위가 차가웠다. 보자기를 베고 누웠다.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걷히고 별이 나왔다. 단천에서 보던 별과 같은 별이었다.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것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
별만큼은 어디서든 같았다.
셋째 날 오후, 강물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바람이 없는데 소리가 났다. 귀를 기울였다. 낮고 끊임없는 소리였다. 강물 소리였다.
두만강이었다.
다리가 빨라졌다. 빨리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관아 포졸들이 있을 수 있었다.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강물 소리가 발을 끌어당겼다.
갈대밭이 나왔다.
강변이었다. 갈대밭 안으로 몸을 숨겼다. 강이 보였다. 두만강이었다. 처음 보는 강이었다.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그러나 물살이 빠를 것 같았다. 표면이 검고 매끄럽게 흘렀다. 강 건너편에 연해주 땅이 보였다. 어둠 속에 잠긴 지평선이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기다려야 했다.
문장손은 갈대밭 안에 쭈그려 앉았다. 보자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볍씨 봉지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쏟아보았다. 작고 단단한 낟알들이었다. 이것들이 저 강 건너 땅에서 자랄 수 있을까. 저 낯선 흙에서 자랄 수 있을까.
자랄 것이었다.
자라야 했다.
놋쇠 숟가락을 꺼냈다. 어머니의 것이었다.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이었다. 차가웠다. 손안에서 쥐었다. 강물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갈대를 흔들었다.
문장손은 그렇게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갈대밭 안에 쭈그려 앉아, 볍씨를 손에 쥐고, 어머니의 놋쇠 숟가락을 쥐고, 두만강의 강물 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카레이스키의 시작이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새벽이, 120년의 시작이었다.

안산, 1995년 여름 저녁.
드미트리는 갈리나 아주머니 식당에서 나디아와 마주 앉아 있었다.
된장국이 뚝배기 안에서 끓고 있었다. 그 소리가 강물 소리처럼 들렸다. 낮고 끊임없는 소리였다.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디아 씨,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기 전날 밤에 뭘 하셨을 것 같아요?"
나디아가 숟가락을 들다가 멈추었다.
"갈대밭에서 기다리셨겠죠."
"맞아요. 동이 트기를 기다리셨겠죠. 볍씨를 쥐고, 어머니 숟가락을 쥐고."
나디아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드미트리는 잠시 생각했다.
"무서우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걷는 것이 무서움을 이기는 방법이라는 걸 아셨을 것 같아요."
나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할머니도 그러셨을 거예요. 화물칸에 실리던 날."
두 사람이 잠시 말이 없었다.
된장국이 끓는 소리만 들렸다.
드미트리는 주머니에서 놋쇠 숟가락을 꺼냈다.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디아가 그것을 바라보았다. 오래 바라보았다.
"이것이 그 숟가락이에요?"
"네. 단천에서 두만강을 건넌 숟가락이에요."
나디아가 손을 뻗었다.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갑네요."
"곧 따뜻해져요. 언제나 그래요."
나디아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두만강의 그 새벽과 안산의 이 저녁이 이 숟가락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1902년과 1995년이 이 작고 낡은 놋쇠 숟가락 안에서 만나고 있었다.
갈리나 아주머니가 된장국을 더 퍼주러 왔다.
두 사람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국을 퍼주고 돌아갔다. 그 뒷모습이 따뜻했다.
된장국이 뜨거웠다.
먹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먹었다.
1902년 두만강 갈대밭에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던 문장손이, 지금 이 순간 안산의 작은 식당에서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카레이스키는 그렇게 이어졌다.
시간을 건너, 땅을 건너, 사람을 건너.

다음 회에서는 1902년 두만강 새벽, 문장손이 갈대밭을 나와 차가운 강물 속으로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안산에서는 드미트리와 나디아가 카자흐스탄 방문을 위해 함께 돈을 모으기 시작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1900년대 초 함경도 이주민 역사 및 두만강 월경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및 재외동포재단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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