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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시멘트마당에서 쓰는 카레이스키

[카레이스키 유랑사 019회]아버지의 편지, 1994년 가을

by Zorbamoon 2026.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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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 유랑사 019회] 아버지의 편지, 1994년 가을

바이라인: 조르바문

 

"카레이스키 유랑사 019회 아버지의 편지 1994년 가을 고려인 드미트리 카레이스키"

 

편지는 손으로 쓴 것이다.

전화도 아니고 전보도 아니고 손으로 쓴 것이다.

손으로 쓴 글씨에는 목소리가 담긴다. 볼펜을 눌러쓴 힘이 담긴다. 쓰다가 멈춘 자리가 담긴다. 고쳐 쓴 흔적이 담긴다.

그래서 편지는 읽는 것이 아니다.

만나는 것이다.

 

문드미트리가 카자흐스탄 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은 것은 1994년 가을이었다. 안산의 고시원 방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카자흐스탄 소인이 찍힌 봉투였다. 드미트리는 그 봉투를 보는 순간 발걸음이 멈추었다.

아버지의 글씨였다.

드미트리는 방으로 올라갔다.

봉투를 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서두르지 않았다. 이 봉투를 빨리 뜯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이 편지를 쓰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지 생각했다.

 

방문을 열었다.

들어가서 불을 켰다.

침대에 앉았다.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바라보았다. 카자흐스탄의 우편 소인이 찍혀 있었다. 봉투 모서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구겨진 것이었다.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편지지가 나왔다. 두 장이었다. 러시아어로 빼곡히 쓰여 있었다. 아버지 빅토르의 글씨였다. 크고 힘 있는 글씨였다. 콜호스 기계를 다루던 손으로 쓴 글씨였다.

드미트리는 첫 줄을 읽었다.

드미트리야, 잘 있냐.

그 네 글자를 읽는 순간 눈물이 났다.

 

참으려고 했다. 참아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당에 서서 별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등을 한 번 두드려주던 그 거친 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눈물을 닦았다.

다시 읽었다.

드미트리야, 잘 있냐.

 

여기는 가을이 왔다. 논에 벼가 익었어. 올해는 작년보다 수확이 좋았다. 네가 없으니 일손이 부족해서 최명준 아저씨 아들 최영호 아버지가 도와줬어.

최영호는 잘 있냐. 거기서 잘 지내고 있겠지.

어머니는 건강하다. 처음에는 네가 없어서 많이 힘들어하셨어. 밥을 잘 안 드셨어. 그런데 요즘은 괜찮아. 네 편지가 오는 날이면 밥을 두 그릇씩 드신다.

드미트리는 그 문장을 읽다가 멈추었다.

 

어머니가 편지가 오는 날 밥을 두 그릇씩 드신다는 것이었다.

눈물이 다시 났다.

닦았다.

계속 읽었다.

나는 여전히 논을 보고 있어.

증조할아버지 문장손이 단천에서 가져오신 볍씨에서 시작된 벼가 올해도 이 카자흐스탄 땅에서 자랐어. 할아버지 문인수가 황무지에 도랑을 파고 물을 끌어와서 만든 그 논에서.

이 논을 볼 때마다 생각해.

 

이 논이 우리 집안의 역사라는 것을. 이 논 한 뙈기가 120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네가 대한민국에 가져간 볍씨는 잘 있냐.

거기서도 심었냐.

드미트리는 편지를 잠시 내려놓았다.

 

볍씨.

방 한켠 보자기 안에 있는 그 볍씨였다. 어머니가 챙겨준 그 볍씨였다. 안산의 고시원 방에서 아직 심지 못한 그 볍씨였다.

드미트리는 보자기를 꺼냈다.

볍씨 봉지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쏟았다. 작고 딱딱한 낟알들이었다. 아직 살아있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여기까지 온 씨앗이었다.

심어야 했다.

어디에 심을 수 있을지 몰랐다. 고시원 방에는 흙이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에 심어야 했다. 아버지가 물었다. 거기서도 심었냐고.

대답을 해야 했다.

볍씨를 다시 봉지에 넣었다. 편지를 다시 들었다.

드미트리야.

한 가지만 말할게.

거기 가면 힘들 것이라고 했지. 맞지? 힘들지?

그러나 기억해.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던 날 강물이 차가웠어. 할아버지가 카자흐스탄에 처음 왔을 때 황무지가 붉었어. 내가 처음 콜호스에서 일할 때 소련 관헌들이 우리를 사람 취급을 안 했어.

그래도 버텼어.

씨앗은 어디서든 자란다고 했잖아.

너도 자랄 거야. 거기서.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한 가지 더.

너를 보내고 나서 별을 봤어.

네가 가져간 하늘이랑 내가 보는 하늘이 같은 하늘이더라.

외로우면 별 봐.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아버지가.

드미트리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방 안이 조용했다.

안산의 가을 저녁이었다. 창밖으로 골목의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디선가 된장 냄새가 났다.

드미트리는 오래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글씨가 적힌 편지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크고 힘 있는 글씨였다. 콜호스에서 기계를 다루던 손이 이것을 썼다. 그 손이 자신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눈물이 다 마를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보자기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펜을 들었다. 러시아어로 썼다.

아버지.

편지 받았습니다.

어머니 두 그릇 드신다는 말에 눈물이 났습니다. 저 때문에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볍씨 아직 심지 못했습니다. 고시원이라는 곳에 사는데 흙이 없어서요. 그런데 심을 곳을 찾겠습니다. 반드시 찾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여기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고려인 여자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에요. 이름은 강나디아입니다. 할머니가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당하셨대요. 볍씨를 가져오셨대요.

같은 씨앗을 가진 사람입니다.

별은 여기서도 보입니다. 카자흐스탄만큼 많지는 않지만, 있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있다고 하셨으니 믿겠습니다.

드미트리 올림.

편지를 접었다.

봉투에 넣었다. 카자흐스탄 주소를 썼다.

내일 우체국에 가져가야 했다.

드미트리는 방 불을 껐다.

어둠 속에 누웠다. 창밖으로 안산의 밤하늘이 보였다.

별이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가져간 하늘이랑 내가 보는 하늘이 같은 하늘이라고.

같은 하늘이었다.

드미트리는 그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강나디아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이 하늘을 보았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카자흐스탄에서 이 하늘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어머니가 된장국을 끓이다 창밖을 보며 이 하늘을 보았을 것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모두 있었다.

드미트리는 눈을 감았다.

내일 볍씨를 심을 곳을 찾아야 했다.

반드시 찾아야 했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썼으니까.

"1994년 가을 안산 고시원 방에서 카자흐스탄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고려인 드미트리 카레이스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드미트리는 일찍 일어났다.

보자기에서 볍씨 봉지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이것을 어디에 심을 수 있을까.

고시원 방에는 흙이 없었다.

화분이 없었다.

창가도 좁았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미트리는 공장 출근길에 철물점 앞을 지나쳤다. 화분이 있었다. 작은 플라스틱 화분이었다. 흙도 팔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멈추었다.

화분을 들었다.

흙을 집었다.

얼마냐고 물었다. 한국말로 물었다. 주인이 대답했다. 드미트리는 돈을 냈다.

화분을 들고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방 창가에 화분을 올려놓았다. 흙을 담았다. 볍씨를 꺼냈다. 하나씩 심었다.

손가락으로 흙을 살짝 덮었다.

증조할아버지 문장손이 연해주 돌밭에서 했던 것처럼. 할아버지 문인수가 카자흐스탄 황무지에서 했던 것처럼.

하나씩,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덮었다.

다 심고 나서 물을 조금 주었다.

창가에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안산의 가을 햇살이었다. 그 햇살이 화분 위에 떨어졌다.

드미트리는 그 화분을 바라보았다.

고시원 방 창가의 작은 플라스틱 화분이었다. 연해주의 논과 달랐다.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와 달랐다. 그러나 씨앗은 심어졌다. 대한민국의 흙 안에 카레이스키의 씨앗이 심어졌다.

이제 자라기만 하면 됐다.

1994년 가을 안산 고시원 창가 작은 화분에 볍씨를 심는 고려인 드미트리의 손 카레이스키 씨앗"

 

다음 회에서는 고시원 창가의 화분에서 싹이 트기 시작하는 겨울, 그리고 드미트리와 강나디아의 인연이 한 걸음 더 깊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1990년대 고려인 한국 정착 역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재외동포재단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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