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이스키 유랑사 018회] 안산 골목의 인연, 1994년 봄
바이라인: 조르바문

인연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부딪히는 것이다. 준비하지 않은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골목에서, 아무 계획도 없이 걷다가 부딪히는 것이다. 문장손이 신한촌 우물가에서 박순이와 눈이 마주쳤던 것처럼. 문인수가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에서 류드밀라를 만났던 것처럼. 문빅토르가 콜호스에서 나탈리아를 알게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문드미트리가 안산의 좁은 골목에서 그 여인을 만난 것처럼. 카레이스키의 인연은 언제나 그렇게 왔다. 소리 없이, 예고 없이, 그러나 필연처럼.
1994년 봄이었다.
안산에 온 지 두 해가 지났다.
드미트리는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한국말이 늘었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더듬거렸다. 그러나 공장 동료들과 기본적인 대화는 할 수 있었다. 점심 식당에서 반찬을 달라고 할 수 있었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길을 물어볼 수 있었다. 작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것들이 쌓여서 하루하루가 달라졌다.
공장 일도 손에 익었다.
처음에는 가르쳐주는 대로만 했다. 그러나 두 해가 지나자 기계 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 수 있었다. 콜호스에서 트랙터를 만지던 손이 여기서도 살았다. 담당 반장이 드미트리를 믿기 시작했다. 어려운 기계 문제가 생기면 드미트리를 불렀다. 그럴 때 드미트리는 소련 놈 소리가 생각났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그냥 기계를 고쳤다.
최영호는 다른 공장으로 옮겼다.
더 돈을 많이 주는 공장이 있다고 했다. 드미트리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남았다. 갈리나 아주머니의 식당이 있었다. 그 된장국이 있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최영호는 이해하지 못했다. 된장국 때문에 공장을 안 옮기냐고 했다. 드미트리는 웃었다. 그냥 웃었다.
된장국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골목이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공장 담벼락 아래 민들레가 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퇴근길에 늘 지나치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가 이제 드미트리를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여주기 때문이었다. 작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것들이 이 골목을 자신의 골목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뿌리가 내리는 중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공장이 쉬는 날이었다. 드미트리는 아침 늦게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갈리나 아주머니 식당으로 가려고 걸었다. 골목이 평소와 달리 한산했다. 토요일이라 공장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골목 어귀에서 멈추었다.
누군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좁은 골목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자였다. 드미트리와 비슷한 나이 같았다. 검은 머리였다. 드미트리는 그 앞을 지나가려다 멈추었다.
그 여자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민들레였다.
공장 담벼락 아래 핀 그 민들레였다. 드미트리가 봄마다 보아온 그 민들레였다. 그 여자가 손가락으로 민들레 꽃잎을 조심스럽게 건드리고 있었다. 건드리고 나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보았다.
드미트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멈추었는지 자신도 몰랐다. 그냥 멈추어졌다. 지나가야 하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드미트리는 당황했다. 멀뚱히 서서 바라보다가 들킨 것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한국말로 해야 하는지, 러시아어로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 여자가 먼저 말했다.
러시아어였다.
"왜 쳐다봐요?"
드미트리가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민들레 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민들레를 다시 보았다가 드미트리를 보았다.
"고려인이에요?"
"네. 카자흐스탄이요."
"저는 우즈베키스탄이에요."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갈리나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우즈베키스탄. 같은 강제이주의 후손이었다. 다른 땅으로 흩어졌지만 같은 뿌리였다.
"여기서 일해요?"
"네. 저 공장이요."
그 여자가 드미트리가 가리킨 공장을 바라보았다.
"저는 저쪽 공장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미트리가 말했다.
"민들레 좋아해요?"
그 여자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조금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카자흐스탄에도 있거든요. 봄마다."
그 여자가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에도요."
그 짧은 말이 드미트리의 가슴 안에서 이상하게 울렸다.
우즈베키스탄에도 민들레가 피었다. 카자흐스탄에도 민들레가 피었다. 대한민국에도 민들레가 피었다. 씨앗은 어디서든 자랐다. 그것이 카레이스키와 같았다.
"이름이 뭐예요?"
드미트리가 물었다.
"나디아예요. 강나디아."
강나디아. 강씨였다. 조선 성씨였다. 러시아 이름을 가졌지만 조선 성씨를 간직하고 있는 여자였다.
"저는 문드미트리입니다."
그 여자, 강나디아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문씨."
"네."
"우리 할머니가 문씨 집안 이야기 해주셨어요. 연해주에서 유명한 집안이었다고."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해주에서 유명한 집안. 증조할아버지 문장손이 신한촌에서 군자금을 모으고 볍씨를 심던 그 이야기가 다른 집안에까지 전해져 있었다.
"정말요?"
"할머니 말이 그랬어요."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민들레가 바람에 흔들렸다. 안산의 봄바람이었다. 그 바람이 골목을 지나갔다.

그날 이후 드미트리는 강나디아를 자주 보았다.
골목에서 마주쳤다. 갈리나 아주머니 식당에서도 마주쳤다. 나디아도 그 식당의 단골이었다. 된장국을 좋아했다. 우즈베키스탄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국과 비슷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드미트리가 밥을 먹고 있으면 나디아가 들어왔다. 나디아가 밥을 먹고 있으면 드미트리가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갈리나 아주머니가 그 모습을 보며 혼자 흐뭇해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러시아어로 나누었다. 나디아의 러시아어가 유창했다. 드미트리도 러시아어는 완벽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말이 제대로 통했다. 공장에서는 늘 한국말을 더듬거렸다. 박성호와는 조선말과 러시아어를 섞어서 했다. 그러나 나디아와는 달랐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다.
나디아가 우즈베키스탄 이야기를 했다.
타슈켄트 근처 고려인 마을에서 자랐다고 했다. 할머니가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당했다고 했다. 할머니가 늘 말했다고 했다. 우리 고향은 저 멀리 조선이라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고. 그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드미트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같은 이야기였다. 카자흐스탄에서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도, 타지키스탄에서도, 중앙아시아 어디에 흩어진 고려인이든 같은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고 살았을 것이었다.
"드미트리 씨는 왜 한국에 왔어요?"
나디아가 물었다.
"아버지가 가라고 하셨어요."
"왜요?"
드미트리는 잠시 생각했다.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셨어요. 할아버지가 카자흐스탄에서 볍씨를 심으셨어요. 아버지가 그 씨앗을 이어받으셨어요. 그리고 저한테 여기 와서 뿌리를 내리라고 하셨어요."
나디아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볍씨를 가져왔어요?"
"네."
"지금도 있어요?"
"있어요."
나디아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우리 할머니도 볍씨를 가져오셨대요.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오실 때."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뜨거워졌다.
같은 씨앗이었다.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이 화물칸 안에서 저마다 볍씨를 품에 안고 왔던 것이었다.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화물칸에서도,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화물칸에서도. 그 씨앗이 중앙아시아 황무지에서 살아남았고, 이제 그 씨앗의 후손들이 안산의 좁은 골목에서 마주 앉아 된장국을 먹고 있었다.
갈리나 아주머니가 된장국을 더 퍼주러 왔다.
드미트리와 나디아를 번갈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국을 퍼주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 뒷모습에서 웃음이 보였다.
봄이 깊어갈수록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퇴근 후 골목을 함께 걸었다. 갈리나 아주머니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주말에는 안산 시장을 함께 걸었다. 드미트리는 그 시간이 좋았다. 말이 통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지 안산에 오기 전에는 몰랐다.
어느 저녁이었다.
시장을 함께 걷다가 나디아가 멈추었다. 노점에서 뭔가를 파는 것이었다. 나물이었다. 봄나물이었다. 드미트리는 그 나물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디아가 그 나물을 보며 환해졌다.
"이거 우리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거예요."
"이름이 뭐예요?"
"냉이예요. 봄에 나는 나물이예요."
드미트리는 그 냉이를 바라보았다.
"카자흐스탄에서 어머니가 뭐 드셨는지 모르겠어요. 봄에."
나디아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요? 어머니."
드미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냉이를 한 단 샀다. 갈리나 아주머니한테 드리면 국을 끓여줄 것 같았다.
나디아가 말했다.
"저도 보고 싶어요. 어머니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안산의 봄 저녁이었다. 골목에 따뜻한 빛이 흘렀다. 사람들이 퇴근하며 지나쳤다. 어딘가에서 밥 냄새가 났다. 된장 냄새가 났다.
드미트리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 여자와 걷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 알아온 사람과 걷는 것 같았다. 같은 씨앗을 품고 온 사람이라서일 것이었다. 같은 이야기를 가슴에 새긴 사람이라서일 것이었다.
카레이스키끼리만 아는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여름이 왔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상 안에 들어와 있었다.
드미트리가 기계를 고칠 때 나디아가 공구를 건네주었다. 나디아가 한국 관청에 서류를 내러 갈 때 드미트리가 함께 갔다. 한국말이 필요한 자리에서 서로를 도왔다. 어느 쪽이 더 잘하는지가 자리마다 달랐다. 드미트리는 기계 관련 한국말을 잘했다. 나디아는 일상 한국말을 잘했다. 그렇게 서로의 빈자리를 채웠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갈리나 아주머니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갈리나 아주머니가 드미트리를 불렀다.
"드미트리 씨."
"네."
아주머니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나디아 씨 좋은 아가씨예요."
드미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처음 여기 왔을 때 남편이 옆에 있었으면 했어요. 낯선 땅에서는 옆에 누군가 있어야 해요. 혼자서는 너무 힘들어요."
드미트리는 갈리나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압니다."
"알면 됐어요."
갈리나 아주머니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드미트리는 골목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름 하늘이었다. 별이 보였다. 카자흐스탄의 별만큼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있었다.
아버지의 말이 들렸다.
외로우면 별 봐. 그러면 여기가 생각날 거야. 여기가 생각나면 힘이 날 거야.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드미트리는 별을 보아도 카자흐스탄만 생각나지 않았다. 옆에 나디아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났다.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드미트리는 알았다.
그러나 아직 말하지 않았다.
때가 아직 아니었다. 뿌리가 충분히 내리지 않은 씨앗은 꽃을 피우지 않는 법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조금 더 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했다.
놋쇠 숟가락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여름밤공기 속에서도 그 숟가락은 차가웠다. 그러나 손 안에서 곧 따뜻해질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카레이스키의 인연은 그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안산의 봄 골목에서 시작된 그 인연이, 여름을 지나 가을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연이 5대 문하나를 세상에 내보낼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 드미트리는 안산의 여름 하늘 아래 서서, 손바닥 위에서 따뜻해지는 놋쇠 숟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회에서는 드미트리와 나디아의 인연이 깊어지는 가을 이야기와, 그 무렵 드미트리에게 날아온 카자흐스탄 아버지의 편지를 따라갑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1990년대 고려인 한국 정착 및 안산 고려인 마을 역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재외동포재단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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