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이스키 유랑사 015회]
구름 아래 카자흐스탄, 구름 위 대한민국 1992년
바이라인: 조르바문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땅이 작아진다.
산도 작아지고 강도 작아지고 도시도 작아진다.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작아진 땅 위에서 사람들은 평생을 싸우고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 증조할아버지 문장손이 평생을 일군 연해주의 논도, 할아버지 문인수가 맨손으로 파낸 카자흐스탄의 도랑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손톱만 한 크기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손톱만 한 땅 위에서 카레이스키의 120년이 흘렀다. 문드미트리는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그 하늘 위로 올라가면서, 그것을 알았다. 땅은 작아지지만 그 땅 위에서 살아낸 것들은 작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마티 공항은 처음 보는 세상이었다.
드미트리는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알마티에 한 번 가보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공항이라는 곳은 텔레비전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 공항 안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보자기와 가방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 안내 방송이 카자흐어와 러시아어로 울려 퍼졌다. 냄새가 낯설었다. 기름 냄새와 사람 냄새와 알 수 없는 화학 냄새가 뒤섞였다.
최영호가 드미트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표정이 왜 그래."
"긴장돼."
"나도."
"너도?"
"당연하지. 비행기 처음 타는데."
드미트리가 최영호를 바라보았다. 최영호도 긴장한 것이 보였다. 손가락을 자꾸 꼼지락거렸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했다. 드미트리는 그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그러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수속을 밟았다.
서류를 내밀었다. 담당자가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드미트리는 그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담당자가 고개를 들었다.
"고려인이요?"
"네."
"한국 가요?"
"네."
담당자가 잠시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신기함인지, 측은함인지, 아니면 그냥 무관심인지. 담당자가 도장을 찍었다. 서류를 돌려주었다.
"통과."
그것으로 끝이었다.
드미트리는 그 서류를 받아 쥐었다. 손이 떨렸다. 이 서류 한 장으로 카자흐스탄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던 날에는 서류 같은 것이 없었다. 그냥 강물 속으로 발을 넣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도장 하나로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세상이 달라졌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은 1902년 두만강 새벽이나 1992년 알마티 공항이나 다르지 않았다.
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비행기가 출발하기까지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드미트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활주로가 보였다. 비행기들이 서 있었다. 저 큰 쇳덩어리가 하늘을 난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최영호가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
"별로."
"나는 배고픈데. 긴장하면 배가 고파."
"이상한 체질이네."
"어머니가 주먹밥 챙겨줬어. 먹을래?"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먹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꽉 막혀 있었다. 그 막힌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두드려준 등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어서인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놋쇠 숟가락이 손에 잡혔다. 차가웠다. 단단했다. 드미트리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손안에서 쥐었다. 그 감촉이 마음을 잡아주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며 이것을 쥐었을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화물칸의 어둠 속에서 이것을 더듬었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것을 자신에게 넘겨주던 날 밤, 손바닥 위에서 차갑던 것이 따뜻해지던 그 감촉.
지금 이 공항의 대기실에서도 그 감촉은 같았다.
차갑던 것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탑승 안내 방송이 울렸다.
러시아어였다. 드미트리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최영호가 벌떡 일어났다.
"가자."
두 사람이 줄을 섰다. 좁은 통로를 지나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 안은 드미트리가 상상하던 것보다 좁았다. 의자가 촘촘히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짐을 올리고 자리를 찾느라 북적였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창가 자리였다.
창밖으로 알마티 공항이 보였다.
활주로가 보였다. 멀리 카자흐스탄의 벌판이 보였다. 아직 봄이 완전히 오지 않은 카자흐스탄의 들판은 갈색이었다. 눈이 녹고 풀이 아직 나지 않은 그 갈색 벌판이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드미트리는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저 벌판 어딘가에 아버지가 있었다.
논두렁을 손보고 있을 것이었다. 트랙터를 만지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마당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아들이 탄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하늘을.
최영호가 드미트리의 팔을 쿡 찔렀다.
"야, 안전벨트."
드미트리는 정신을 차리고 안전벨트를 맸다.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다가 속도가 붙었다. 활주로를 달렸다. 속도가 더 붙었다. 드미트리는 몸이 의자에 눌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땅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몸이 둥실 뜨는 것 같았다.
창밖을 보았다.
알마티 공항이 작아지고 있었다. 건물들이 작아졌다. 도로가 실처럼 가늘어졌다. 자동차들이 점처럼 보였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벌판이 펼쳐졌다. 끝이 없는 벌판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카자흐스탄의 벌판은 드미트리가 평생 땅 위에서 보아온 것과 달랐다. 더 넓었다. 더 광활했다. 그리고 더 작았다.
눈물이 났다.
드미트리는 당황했다. 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눈물이 났다. 카자흐스탄의 벌판이 창밖에서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저 벌판이 자신의 땅이었다. 태어난 땅이었다. 뛰어놀던 땅이었다. 트랙터를 몰던 땅이었다. 아버지가 볍씨를 심은 땅이었다. 할아버지가 황무지를 논으로 만든 땅이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눈을 감은 땅이었다.
그 땅이 작아지고 있었다.
최영호가 옆에서 말없이 있었다. 드미트리가 창밖을 보며 눈물을 닦는 것을 보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앞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친구의 예의였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흰 것들이 창문을 가득 채웠다. 카자흐스탄의 벌판이 사라졌다. 흰 구름만 보였다. 드미트리는 그 흰 것들을 바라보았다. 구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구름의 안쪽이었다.
그러다 비행기가 구름 위로 올라갔다.
창밖이 갑자기 눈부시게 밝아졌다. 구름이 아래로 깔렸다. 하얀 구름들이 바다처럼 펼쳐졌다. 그 위로 하늘이 파랗게 열렸다. 드미트리가 평생 땅 위에서 올려다보던 그 하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하늘 안에 자신이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이 하늘을 보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도 보지 못하셨다. 아버지도 보지 못하셨다. 자신이 처음으로 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카레이스키 4대가 처음으로 올라온 하늘이었다.
구름 아래에 카자흐스탄이 있었다.
구름 위에 대한민국이 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자신이 있었다. 두만강과 대한민국 사이. 연해주와 카자흐스탄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 어딘가에 문드미트리가 있었다.
주머니에서 놋쇠 숟가락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비행기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 숟가락 위에 떨어졌다. 낡고 거칠고 작은 숟가락이었다. 그러나 햇살을 받은 그 숟가락이 반짝였다. 처음 보는 반짝임이었다. 카자흐스탄의 흐린 하늘 아래서는 보지 못하던 빛이었다.
드미트리는 그 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단천에서 왔다. 두만강을 건넜다. 연해주를 일궜다. 화물칸에 실렸다. 황무지에서 살아남았다. 콜호스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지금 이 하늘 위에 있었다.
이 작은 숟가락이 걸어온 길이었다.
비행기가 서울 김포공항에 내린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내리기 전에 기장이 방송을 했다. 한국어였다. 드미트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옆에 앉은 한국 승객이 알아들었는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도 따라서 짐을 챙겼다.
비행기가 땅에 닿는 순간 충격이 왔다.
쿵. 그리고 브레이크 소리.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렸다. 창밖으로 김포공항의 불빛들이 보였다. 환한 불빛들이었다. 알마티 공항과 달랐다. 더 많았고 더 밝았다.
최영호가 말했다.
"왔다."
드미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왔다. 대한민국에 왔다.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며 등진 땅의 후손들이 사는 나라에 왔다. 120년 만이었다. 문장손이 단천을 떠난 지 120년 만에, 그 후손이 대한민국 땅을 밟으러 왔다.
드미트리는 창밖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서울의 불빛이었다. 그때는 화면 속 그림이었다. 지금은 창밖의 현실이었다. 그림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빛이었다.
손에서 놋쇠 숟가락을 꽉 쥐었다.
차가웠다. 그러나 이제 곧 따뜻해질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차가운 것이 손안에서 체온을 머금으면 따뜻해졌다. 낯선 것이 익숙해지면 집이 되었다. 두만강이 그랬고, 연해주가 그랬고, 카자흐스탄이 그랬다.
대한민국도 그럴 것이었다.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믿어야 했다.
비행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일어섰다. 드미트리도 일어섰다. 보자기를 챙겼다. 통로를 따라 걸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계단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대한민국의 땅이었다.
드미트리는 계단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카자흐스탄의 공기와 달랐다. 더 습했다. 더 따뜻했다. 어딘가 다른 냄새가 났다. 바다 냄새인지, 도시 냄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냄새가 낯설지 않았다. 처음 맡는 냄새인데 낯설지 않았다.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이 냄새가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무언가와 같은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120년 동안 대륙을 떠돌면서도 잊지 않았던 그 무언가와.
첫 발을 내딛었다.
대한민국의 땅이 발밑에서 느껴졌다. 아스팔트였다. 딱딱했다. 카자흐스탄의 붉은 흙과 달랐다. 그러나 발밑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알 수 없는 온기가.

드미트리는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한민국의 밤하늘이었다. 별이 보였다. 아버지가 말했던 그 별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 보던 별과 자리가 조금 달랐다. 그러나 같은 별이었다. 분명히 같은 별이었다.
외로우면 별 봐. 그러면 여기가 생각날 거야. 여기가 생각나면 힘이 날 거야.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서 울렸다.
드미트리는 고개를 내렸다.
최영호가 옆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이 앞으로 걸었다.
대한민국의 첫 번째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회에서는 드미트리와 최영호가 대한민국에서 처음 맞이하는 새벽을 따라갑니다. 안산 공단의 첫 번째 아침, 낯설고 차갑고 눈부신 그 풍경 속에서 카레이스키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1992년 고려인 한국 귀환 및 재외동포 역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재외동포재단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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