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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시멘트마당에서 쓰는 카레이스키

[카레이스키 유랑사 013회]소련의 마지막 겨울, 1991년 12월

by Zorbamoon 2026.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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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 유랑사 013회]
소련의 마지막 겨울, 1991년 12월

바이라인: 조르바문

카레이스키 유랑사 013회 소련의 마지막 겨울 1991년 12월 카자흐스탄 고려인"

제국이 무너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조용하다.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댐이 무너질 때 처음에는 실금이 가고, 그 실금으로 물이 새고, 새는 물이 점점 굵어지다가 어느 순간 그냥 무너진다. 소련이 그랬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사임을 선언했다. 크렘린 궁 위에서 소련 국기가 내려갔다. 러시아 국기가 올라갔다. 70년을 버텨온 제국이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마을에서, 문드미트리는 그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다.

 

그해 12월은 유난히 추웠다.

카자흐스탄의 겨울은 매년 혹독했지만 1991년 12월은 달랐다. 바람이 더 거칠었다. 하늘이 더 낮게 내려앉았다. 눈이 쌓이고 또 쌓였다. 마을 길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으로 막혔다. 사람들이 삽을 들고 나와 길을 텄다. 숨을 쉬면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드미트리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텔레비전을 켰다. 소련 붕괴의 소식이 날마다 쏟아졌다. 발트 3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했다. 카자흐스탄도 독립을 선언했다. 나자르바예프가 카자흐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지도가 바뀌었다. 나라 이름이 바뀌었다. 어제까지 소련 카자흐 공화국이었던 땅이 오늘은 카자흐스탄 공화국이 되었다.

 

빅토르가 드미트리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이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고르바초프가 마지막 연설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어였다. 드미트리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오랜 세월 소련의 언어로 교육받은 덕분이었다. 고르바초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담담하게 끝을 말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낮게 말했다.

"끝났구나."

드미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70년이야. 네 증조할아버지가 화물칸에 실렸던 그 나라가 70년 만에 끝났어."

텔레비전 화면에서 크렘린 궁의 소련 국기가 천천히 내려갔다. 드미트리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붉은 국기가 내려가는 장면이었다. 그 붉은색이 1937년 카자흐스탄의 붉은 황무지와 겹쳐 보였다. 증조할아버지가 화물칸에서 내려 처음 밟았던 그 붉은 땅과.

"아버지."

"응."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빅토르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카자흐스탄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떠나거나."

"떠나면 어디로요?"

"우리나라로."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마티에서 만났던 박성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아있는 온기. 그 악수. 주머니 속 명함.

"아버지, 저 갈 겁니다."

 

빅토르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어."

"같이 가시면 안 됩니까?"

빅토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러시아 국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붉은 국기 대신 흰색 파란색 붉은색의 줄무늬 국기가.

"나는 여기 남아야 해."

"왜요?"

빅토르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문장손의 눈빛이었다. 문인수의 눈빛이었다. 꺾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볍씨 때문이야."

 

드미트리가 눈을 들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단천에서 가져온 볍씨가 이 땅에 뿌리를 내렸어. 할아버지가 황무지에서 심어서 키운 벼가 이 땅에 있어. 그것을 버리고 가면 우리가 이 땅에 있었다는 흔적이 사라져. 누군가는 남아서 지켜야 해."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버지."

"너는 가야 해.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넌 것처럼. 넌 대한민국으로 건너가야 해. 그게 우리 집안의 방식이야. 한 사람이 새 땅으로 건너가고, 뿌리를 내리고, 다음을 이어가는 거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무언가를 계속 말했다. 그러나 드미트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만 들렸다.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넌 것처럼. 넌 대한민국으로 건너가야 해.

드미트리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박성호의 명함이 있었다. 차갑고 얇았다. 그러나 손끝에 닿는 그 감촉이 놋쇠 숟가락의 감촉과 겹쳐졌다.

 

그날 저녁 고려인 마을에 사람들이 모였다.

오래간만이었다. 카자흐스탄이 독립을 선언한 이후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던 그날 저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닥불을 피웠다.

 

신한촌에서 그랬던 것처럼. 카자흐스탄에 처음 왔던 그 겨울 밤에 그랬던 것처럼. 고려인들의 모닥불이었다. 카자흐스탄의 차가운 12월 밤공기 속에서 불이 타올랐다.

 

사람들의 표정이 저마다 달랐다.

두려운 얼굴이 있었다. 카자흐스탄이 독립하면 우리는 또 이방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1937년처럼 또 어딘가로 던져지는 것이 아닌가. 그 두려움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다. 그러나 다른 표정도 있었다. 어딘가 후련한 표정. 70년을 짓눌렀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은, 오히려 자유로워진 것 같은 표정.

 

드미트리는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모두 자신의 가족이었다. 아니, 가족보다 더한 사람들이었다. 화물칸에서 함께 한 달을 버텼던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황무지에서 함께 토굴을 팠던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된장국을 나눠 먹고 함경도 민요를 함께 불렀던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최명준의 아들 최영호가 드미트리 옆에 앉았다.

 

드미트리와 같은 나이였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 트랙터를 함께 몰았다. 콜호스에서 함께 일했다.

"어떻게 될 것 같아?"

최영호가 물었다.

"모르겠어."

"무섭지 않아?"

드미트리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무서워."

"나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있잖아."

드미트리가 말을 이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 건널 때도 무서웠대. 차가운 강물에 발을 넣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대. 그래도 건넜어."

최영호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두려워도 발을 내딛으면 된다는 거야. 그게 우리 방식이래."

최영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모닥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 거야?"

"한국."

최영호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진짜?"

"응. 아버지도 가라고 하셨어."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드미트리는 최영호를 바라보았다. 증조할아버지 문장손과 최서방이 신한촌에서 함께 살았던 것처럼. 아버지 빅토르와 최명준이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에서 함께 도랑을 팠던 것처럼. 이 집안과 저 집안은 두만강을 건넌 이후로 언제나 함께였다.

"같이 가자."

모닥불이 타올랐다.

 

카자흐스탄의 차가운 12월 밤하늘에 불꽃이 튀었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 함경도 민요였다. 드미트리는 그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노래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이 사람들과 함께 모닥불 앞에 앉을 수 있는 밤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그러나 슬프지 않았다.

두만강을 건너던 증조할아버지도 그랬을 것이었다. 단천의 모닥불을 뒤로하고 두만강을 건넜을 것이었다. 그러나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앞을 보았을 것이었다.

 

드미트리도 앞을 보았다.

저 벌판의 끝, 바다 너머, 대한민국을.

그날 밤 드미트리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보자기를 꺼냈다. 놋쇠 숟가락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웠다. 단단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 감촉만큼은 선명했다.

증조할아버지 문장손. 두만강을 건너며 이것을 품에 안았던 사람.

할아버지 문인수.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에서 이것을 받아 쥐었던 사람.

아버지 문빅토르. 이것을 자신의 손에 쥐여주며 가라고 했던 사람.

 

그리고 이제 자신이었다. 문드미트리. 이 숟가락을 들고 또 한 번의 두만강을 건너야 하는 사람.

드미트리는 숟가락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쇠붙이가 가슴 위에서 천천히 체온을 머금기 시작했다. 차갑던 것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드미트리는 그 변화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내일 아버지에게 말하겠다. 봄이 되면 떠나겠다고. 대한민국으로 가겠다고. 두려워도 발을 내딛겠다고.

카자흐스탄의 12월 밤이 깊어갔다.

그러나 드미트리의 가슴 위에서 놋쇠 숟가락은 따뜻했다.

 

1991년 12월 카자흐스탄 고려인 마을 눈 덮인 벌판에서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은 고려인들 소련 해체 마지막 밤" 썸네일 알트태그

 

다음 회에서는 1992년 봄, 드미트리가 카자흐스탄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따라갑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아침, 그리고 알마티 공항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그 장면으로 들어갑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1991년 소련 해체 및 카자흐스탄 독립 관련 역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재외동포재단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alt="카레이스키 유랑사 013회 소련의 마지막 겨울 1991년 12월 카자흐스탄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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