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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시멘트마당에서 쓰는 카레이스키

[카레이스키 유랑사 012회]대한민국에서 온 사람, 1991년 알마티

by Zorbamoon 2026.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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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 유랑사 012회]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 1991년 알마티

바이라인: 조르바문

 

"카레이스키 유랑사 012회 카자흐스탄 고려인 드미트리 대한민국 첫 만남"

사람은 책에서 배운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지도에서 본 나라를 안다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에서 본 도시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림이다. 그림과 실물은 다르다. 냄새가 다르고 온도가 다르고 숨결이 다르다. 문드미트리가 대한민국을 처음 안 것은 텔레비전 화면에서가 아니었다. 알마티의 어느 시장 골목에서, 낯선 말투로 러시아어를 더듬거리는 한 사내를 만나던 그 순간이었다. 그 사내의 숨결에서 대한민국 냄새가 났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그것이 자신의 뿌리 냄새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1991년 봄이었다.

소련은 아직 공식적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이미 소련이 아니었다. 발트 3국이 독립을 선언했고, 각 공화국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깃발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카자흐스탄도 흔들렸다. 카자흐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거리에서 카자흐어가 들렸다. 러시아어 간판이 내려지고 카자흐어 간판이 올라갔다.

 

고려인 마을은 조용했다.

아니, 조용한 척했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콜호스에 나갔다. 논에 물을 댔다. 밥을 지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달랐다.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자흐스탄이 독립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소련이 무너지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937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가.

 

문빅토르는 그 물음들을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알았다. 아버지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새벽에 일어나 마당에 나가 오래 서 있다는 것을. 그 등이 할아버지 문인수의 등을 닮아 있었다. 카자흐스탄의 첫 번째 겨울 아침, 아버지의 숨소리를 확인하던 할아버지의 등을.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깨우지 않았다.

 

그냥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물음이 밤마다 천장에서 내려왔다. 답이 없었다. 그러나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놋쇠 숟가락을 손에 쥐여주며 했던 말. 우리나라로 가야 해. 네가 가야 해. 그 말이 천장에서 함께 내려왔다.

 

알마티에 처음 간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콜호스 기계 부품을 구하러 갔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는 드미트리가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큰 도시였다. 버스를 타고 여섯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카자흐스탄의 광활한 벌판이 펼쳐졌다. 이 벌판의 끝에 도시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알마티는 달랐다.

마을과 달랐다. 사람이 많았다. 소리가 많았다. 냄새가 많았다. 러시아어, 카자흐어, 알 수 없는 다른 말들이 뒤섞여 거리를 채웠다. 드미트리는 그 도시의 공기에 압도되었다. 걸으면서도 자꾸 서게 되었다. 가게 진열대를 들여다보았다. 사람들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을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 도처에 있었다.

 

부품 상가를 찾아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이 좁았다.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며 지나쳤다. 생선 냄새, 향신료 냄새, 땀 냄새가 뒤섞였다. 드미트리는 상가 번호를 확인하며 걸었다. 그러다 멈추었다.

낯선 말소리가 들렸다.

러시아어가 아니었다. 카자흐어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언어였다. 그러나 어딘가 낯설지 않은 언어였다. 드미트리는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게 앞이었다.

전자 부품을 파는 가게였다. 그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카자흐스탄 상인이었다. 러시아어로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 체구가 작았다. 머리가 검었다. 얼굴이 드미트리 자신과 닮아 있었다. 그 사람이 서툰 러시아어로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러시아어가 서툴렀다. 발음이 달랐다. 단어를 찾느라 자꾸 멈추었다. 상인이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드미트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무엇을 찾습니까?"

러시아어로 물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 이걸 찾는데."

그 사람이 종이를 꺼냈다. 뭔가 적혀 있었다. 부품 이름이었다. 드미트리는 그것을 보고 상인에게 러시아어로 말했다. 상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추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이 러시아어가 아니었다. 드미트리가 아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나누던 그 말이었다. 집 안에서 들리던 그 말이었다. 억양이 달랐다. 조금 달랐다. 그러나 분명히 같은 말이었다.

"지금 조선말로 하셨습니까?"

드미트리가 조선말로 물었다.

그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한국말이요?"

"한국말?"

"네. 한국어요. 저 한국에서 왔어요."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한국. 대한민국.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 나라. 빌딩이 즐비하고 자동차가 넘쳐나던 그 도시. 아버지가 말하던 우리나라.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며 등진 그 땅에서, 지금 이 사람이 왔다.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드미트리가 조선말로 물었다.

그 사람이 드미트리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네. 서울에서요. 근데 어떻게 한국말을?"

"집에서 씁니다. 우리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드미트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다른 눈빛이었다.

"혹시 고려인이세요?"

"네."

 

그 사람이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손을 내밀었다.

"박성호입니다. 무역 일로 왔어요."

드미트리가 그 손을 잡았다.

"문드미트리입니다."

 

두 손이 맞잡혔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좁은 시장 골목에서,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과 카레이스키 청년의 손이 처음으로 맞잡혔다. 그 악수가 짧았다. 그러나 드미트리의 손바닥에 그 온기가 오래 남았다.

"1991년 알마티 처음으로 조국 사람을 만나다 카레이스키 문드미트리"

살아있는 온기였다. 텔레비전 화면 속 온기가 아니었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온기였다. 대한민국이 그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드미트리는 그 악수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박성호는 알마티에 사흘을 머물렀다.

드미트리는 그 사흘 동안 그의 통역을 자청했다. 콜호스 부품은 하루 만에 구했다. 이틀이 남았다.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틀 더 있겠다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알겠다고 했다.

 

박성호와 골목 구석 찻집에 앉았다.

차를 마셨다. 처음에는 러시아어로 이야기했다. 박성호의 러시아어가 서툴렀고 드미트리의 한국어가 서툴렀다. 그러나 조금씩 조선말이 섞이기 시작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억양이 달랐다. 단어가 달랐다. 그러나 통했다. 조선말과 한국어가 뿌리가 같다는 것이 대화 속에서 천천히 드러났다.

박성호가 물었다.

"고려인들은 언제 여기 왔어요?"

"1937년에요. 스탈린이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시켰어요."

"연해주에서 여기까지요?"

"화물칸으로 한 달이요."

박성호가 말이 없었다.

 

"증조할아버지가 오셨어요. 카자흐스탄의 첫 번째 겨울을 넘기지 못하셨고요. 할아버지가 이 땅에서 볍씨를 심었어요. 아버지가 이 땅에서 태어나셨고요. 저도 이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성호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한국에 가고 싶어요?"

드미트리는 그 물음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갈 수 있습니까?"

"지금은 쉽지 않아요. 소련이랑 한국이 수교도 안 됐으니까. 근데 곧 될 거예요. 소련도 무너질 것 같고, 한국도 변하고 있으니까."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들으며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소련도 무너질 거야. 그러면 우리는 돌아가는 거야. 우리나라로.

"갈 겁니다."

드미트리가 말했다.

"언제요?"

"기회가 오면요."

박성호가 웃었다.

"고려인들이 오면 한국 사람들이 반겨줄 거예요. 같은 핏줄이니까."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들으며 말하지 못했다. 정말 그럴까. 120년 동안 대륙을 떠돌며 조국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온 사람들을, 그 조국이 정말 반겨줄까. 김이리나 여사가 안산 공단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다 끝내 추방당했다는 것을 드미트리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것은 훨씬 나중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알마티의 찻집에서,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이 순간만큼은, 드미트리는 믿었다. 믿고 싶었다.

우리를 반겨줄 것이라고.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박성호가 떠났다.

버스 터미널에서 악수를 나누었다. 박성호가 명함을 건네주었다. 서울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한글로 쓰여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 한글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명함을 접어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버스가 떠났다.

드미트리는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알마티의 아침 햇살이 시장 골목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며 지나쳤다. 그 소란 속에서 드미트리는 혼자였다.

 

주머니 속 명함을 손으로 더듬었다.

차갑고 단단했다. 놋쇠 숟가락처럼. 아니, 놋쇠 숟가락과는 달랐다. 숟가락은 120년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명함은 이제 막 시작되는 무언가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창밖으로 카자흐스탄의 벌판이 펼쳐졌다. 끝이 없는 벌판이었다. 증조할아버지 문장손이 화물칸 창틈으로 내다보던 그 벌판이었다. 그러나 드미트리의 눈에는 그 벌판이 다르게 보였다. 끝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끝이 있었다. 저 벌판의 끝에 도시가 있었고, 도시의 끝에 바다가 있었고, 바다의 끝에 대한민국이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대한민국은 그림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박성호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온기였다. 그리고 그 온기가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것과 같은 온기였다.

 

버스는 달렸다.

카자흐스탄의 벌판을 가로질러, 마을을 향해. 아버지가 기다리는 곳으로. 어머니가 된장국을 끓이고 있을 그곳으로. 그러나 드미트리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 벌판의 끝, 바다 너머, 대한민국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 회에서는 1991년 12월 소련이 마침내 해체되던 그날, 고려인 마을에 드리운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 밤을 따라갑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1991년 소련 해체 전후 카자흐스탄 고려인 역사 및 한소수교 관련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재외동포재단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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