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이스키 유랑사 014회]
아버지의 마지막 아침, 1992년 봄
바이라인: 조르바문
떠나는 것은 언제나 새벽이다.
두만강을 건넌 것도 새벽이었다. 화물칸에 실린 것도 새벽이었다. 사람이 가장 약해지는 시간,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그 시간에 인생의 큰 일들은 일어난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새벽에는 붙잡아줄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얼굴도, 살아온 땅도, 심어놓은 볍씨도, 어둠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 발이 앞으로 나간다. 만약 환한 낮이었다면, 그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면, 아무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문드미트리가 카자흐스탄을 떠나던 날도 새벽이었다. 1992년 4월의 차갑고 어두운 새벽이었다.
그 봄은 더디게 왔다.
카자흐스탄의 봄은 원래 더디지만, 1992년의 봄은 유난히 더 더뎠다. 소련이 무너지고 카자흐스탄이 독립 국가가 된 첫 번째 봄이었다. 나라 이름이 바뀌고 돈이 바뀌고 국기가 바뀌었는데, 땅은 여전히 얼어 있었다. 눈이 녹지 않았다. 3월이 지나도 눈이 녹지 않았다. 4월에야 겨우 땅이 풀리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그 봄을 기다렸다.
겨울 내내 준비했다. 알마티에서 받아온 박성호의 명함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한글로 쓰인 글씨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명함을 보면 알마티 시장 골목의 그 악수가 떠올랐다. 살아있는 온기. 그 온기를 향해 가는 것이었다.
비자를 알아봤다. 쉽지 않았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수교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 카자흐스탄과 한국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절차가 복잡했다. 고려인들이 한국에 가려면 서류가 많이 필요했다. 돈도 필요했다. 드미트리는 아버지에게 말하기가 두려웠다. 돈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콜호스에서 받는 돈으로 네 식구가 살았다. 비행기 삯을 내기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빅토르가 먼저 말했다.
어느 저녁이었다. 드미트리가 부품을 손보고 마당에서 들어오는데 빅토르가 방 안에서 불렀다.
"드미트리야."
들어갔다.
빅토르가 상 위에 돈 봉투를 올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비행기 삯이야."
드미트리는 그 봉투를 바라보았다. 두툼했다.
"아버지, 이걸 어떻게."
"겨울 내내 모았어. 콜호스 기계 수리비도 받고, 마을 사람들 트랙터도 고쳐주고."
드미트리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최명준 아저씨도 보탰어. 최영호 같이 간다고 했으니까, 최명준 아저씨 몫도 여기 있어."
드미트리는 봉투를 들었다. 무거웠다. 돈의 무게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겨울이 담긴 무게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기계를 만지며 모은 돈이었다. 손이 곱아드는 카자흐스탄의 겨울을 버티며 모은 돈이었다.
"아버지."
"가져가."
"아버지는요. 어머니는요."
빅토르가 웃었다.
"우리는 여기 있어. 볍씨가 있고, 논이 있고, 우리가 일군 땅이 있어. 굶지 않아."
드미트리는 봉투를 내려놓았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빅토르가 당황했다.
"야, 이게 뭐야."
"감사합니다."
"일어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빅토르는 아들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빅토르의 눈이 흔들렸다. 드미트리는 그 흔들림을 보았다. 아버지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평생 꺾이지 않던 그 눈빛이 지금 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빅토르는 이내 눈빛을 고쳐 잡았다.
"잘 가야 해."
"네."
"거기 가면 힘들 거야. 우리를 반겨줄 것 같아도 쉽지 않을 거야."
드미트리는 말없이 들었다.
"그래도 버텨. 증조할아버지가 두만강 건너서 버텼고, 할아버지가 황무지에서 버텼어. 네가 못 버틸 것 없어."
"네."
"그리고."
빅토르가 잠시 멈추었다.
"잊지 마.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카자흐스탄을 잊지 마. 이 땅에서 증조할아버지가 눈을 감으셨어. 할아버지가 볍씨를 심으셨어. 어머니 아버지가 여기서 자랐어. 잊지 마."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어머니 나탈리아가 밥을 차렸다.
된장국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 담근 된장으로 끓인 국이었다. 드미트리는 그 국을 천천히 먹었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이 맛을 기억해야 했다. 한국에 가면 이 맛이 없을 것이었다. 아니,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끓여준 이 맛은 없을 것이었다.
나탈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을 먹는 아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이 문장손의 어머니가 단천에서 아들을 보내던 그 새벽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울지 않았다. 그냥 바라보았다. 아들보다 더 단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드미트리는 밥을 다 먹고 나서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나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4월의 새벽이었다. 아직 어두웠다. 바람이 찼다. 눈은 녹았지만 아침 공기는 아직 겨울 냄새를 품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새벽 세 시에 눈을 떴다.
잠이 오지 않았다. 누워 있는 것이 답답해서 일어났다. 보자기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놋쇠 숟가락이 있었다. 박성호의 명함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챙겨준 볍씨 봉지가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 볍씨 봉지를 들여다보았다.
어머니가 어젯밤에 넣어두었다.
"가져가라."
"왜요?"
"거기서도 심어야지."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증조할아버지 문장손이 단천에서 두만강을 건너며 볍씨를 품에 안고 건넜던 것처럼. 할아버지 문인수가 화물칸에서 볍씨를 품속에 넣고 카자흐스탄까지 왔던 것처럼. 이제 자신이 그 볍씨를 들고 대한민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씨앗은 이어졌다.
드미트리는 보자기를 단단히 묶었다.
마당으로 나갔다. 어두웠다. 별이 보였다. 카자흐스탄의 별이었다. 이 별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을까. 같은 별인데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니, 같게 보여야 했다. 어디를 가도 별은 같은 자리에 있다고 했다. 증조할아버지가 연해주에서 바라보던 별이 카자흐스탄에서도 같았던 것처럼.
빅토르가 마당에 나와 있었다.
드미트리는 놀랐다. 아버지가 먼저 나와 있었다. 마당 한켠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옆에 섰다.
두 사람이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났다.
빅토르가 말했다.
"별 봐."
"네."
"저 별이 한국에서도 보여. 자리가 조금 다르지만 같은 별이야."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로우면 별 봐. 그러면 여기가 생각날 거야. 여기가 생각나면 힘이 날 거야."
드미트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빅토르가 아들의 등에 손을 얹었다. 크고 거친 손이었다. 카자흐스탄의 황무지를 일군 손이었다. 콜호스의 기계를 만지던 손이었다. 그 손이 드미트리의 등을 한 번 두드렸다.
한 번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드미트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당을 가로질러 사립문을 열었다. 낡은 경첩 소리가 났다. 단천에서 문장손이 사립문을 열고 나가던 그 소리와 같은 소리였다. 드미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멈추었다.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마당에 선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면, 창문 너머 어머니의 실루엣이 보이면, 발이 앞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사립문을 닫았다.
길을 걸었다. 마을 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걸어온 길이었다. 발밑의 흙이 익숙했다. 이 흙에서 자랐다. 이 흙을 밟으며 뛰어다녔다. 이 흙이 카자흐스탄의 흙이었다. 붉고 거칠고 척박한 그 흙이었다. 그러나 이 흙 아래 증조할아버지가 묻혀 있었다. 이 흙 위에서 할아버지가 볍씨를 심었다. 이 흙이 드미트리의 뿌리였다.
발걸음을 빨리 했다.
빨리 걷지 않으면 멈출 것 같았다.
마을 어귀에서 최영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자기를 짊어지고 서 있었다. 드미트리를 보자 손을 들었다.
"왔어."
"응."
"가자."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카자흐스탄의 새벽 길이었다. 아직 어두웠다. 멀리 지평선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동쪽이었다. 해가 뜨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의 끝에, 바다 너머에, 대한민국이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 빛을 향해 걸었다.
두 발이 카자흐스탄의 흙을 밟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자국이 새벽 흙 위에 찍혔다. 그 발자국이 마르기도 전에 다음 발자국이 찍혔다. 증조할아버지가 연해주의 모래톱에 발자국을 남겼던 것처럼, 드미트리가 카자흐스탄의 새벽 흙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걸었다.
멈추지 않았다.

다음 회에서는 알마티 공항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드미트리와 최영호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 그리고 구름 아래로 펼쳐지는 카자흐스탄의 광활한 벌판을 내려다보며 드미트리가 느끼던 그 감정으로 들어갑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1992년 카자흐스탄 고려인 한국 귀환 역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재외동포재단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옥탑방 시멘트마당에서 쓰는 카레이스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카레이스키 유랑사 016회]안산 공단의 첫 번째 새벽, 1992년 (0) | 2026.06.21 |
|---|---|
| [카레이스키 유랑사 015회]구름 아래 카자흐스탄, 구름 위 대한민국 1992년 (0) | 2026.06.21 |
| [카레이스키 유랑사 013회]소련의 마지막 겨울, 1991년 12월 (0) | 2026.06.20 |
| [카레이스키 유랑사 012회]대한민국에서 온 사람, 1991년 알마티 (0) | 2026.06.19 |
| [카레이스키 유랑사 011회]소련이 흔들리다, 드미트리의 청춘 1980년대 (0) | 2026.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