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레이스키 유랑사 006회] 스탈린의 발소리, 연해주에 드리우다 1937년
바이라인: 조르바문
권력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
봄이 오는 것은 안다. 겨울이 길어도 언젠가 눈이 녹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권력의 발소리는 다르다.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쓸어간다. 1937년 연해주의 가을이 그랬다. 문장손이 평생을 일궈온 것들이, 문인수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이, 단 한 장의 명령서로 산산이 부서지던 그 가을이.
1930년대 연해주는 조용하지 않았다.
소련이 들어선 이후 세상이 달라졌다. 차르가 사라지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뒤, 연해주의 조선 사람들은 새 체제에 적응해야 했다. 집단농장, 콜호스가 생겼다. 개인 땅은 없어졌다. 문장손이 평생 돌을 골라내며 일군 논도 콜호스에 넘어갔다. 빼앗긴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빼앗겼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넘겨주었다. 말하면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다.
문장손은 그 시절을 말없이 버텼다.
이미 늙어 있었다. 오십이 넘은 몸이었다. 두만강을 건너던 스물두 살의 그 몸이 아니었다. 허리가 굽었다. 눈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굽지 않았다. 콜호스에서 일했다. 내 땅이 아니어도 일했다. 내 것이 아니어도 씨앗을 심었다. 그것이 문장손의 방식이었다. 땅이 누구 것이든, 씨앗을 심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문인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이제 스물다섯이 된 문인수는 아버지와 달랐다. 소련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다. 소련 체제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콜호스에서 일하면서도 눈치가 빨랐다. 어떤 말을 해야 하고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달랐다. 아버지와 조선말로 이야기했다. 어머니 순이가 끓여주는 된장국을 먹었다. 함경도 자장가를 기억했다.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세상.
그것이 문인수의 삶이었다.
1937년 봄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연해주의 조선 사람들이 일본의 스파이라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일본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이, 일본의 스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손 안에서 어처구니없는 말은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밤에 끌려갔다. 낮에 끌려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끌려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물어보면 안 됐다. 물어본 사람도 사라졌다. 신한촌이 조용해졌다. 아주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모닥불 앞에 모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길에서 만나도 빨리 지나쳤다.
문인수는 그 분위기를 느꼈다.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우리도 위험할 수 있어요."
문장손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빛이 말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어디로 가야 합니까?"
문장손이 천천히 말했다.
"갈 데가 없다."
"카자흐스탄으로 간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중앙아시아로."
"끌려가는 거지, 가는 게 아니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연해주의 가을바람이었다. 그 바람 소리가 예전과 달랐다. 차갑고 날카로웠다.
1937년 8월이었다.
명령이 떨어진 것은 어느 날 갑자기였다.
소련 관헌들이 신한촌에 들이닥쳤다. 말이 명령이지 통보였다. 연해주의 모든 조선 사람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다는 것이었다. 짐은 가져갈 수 있는 것만. 열흘 안에 떠나야 했다.
열흘.
평생을 일군 땅을 버리는 데 열흘이었다. 돌을 골라내며 만든 논을 버리는 데 열흘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운 귀틀집을 버리는 데 열흘이었다. 스탈린의 명령서 한 장이 카레이스키의 35년을 열흘로 만들어 버렸다.
신한촌은 뒤집혔다.
울음소리가 났다. 그러나 크게 울지 못했다. 소련 관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조용히 울었다. 마당 한켠에 심어둔 된장독을 바라보며 울었다. 장독대 앞에 서서 울었다. 고추나무 앞에서 울었다. 이 낯선 땅에서 조선의 것을 심고 키우며 살아온 세월이, 열흘 안에 모두 버려져야 했다.
문장손은 울지 않았다.
방 안에 들어가 앉았다. 보자기를 꺼냈다. 단천에서 가져온 볍씨 봉지는 이미 오래전에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 봉지는 버리지 않았다. 놋쇠 숟가락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차가웠다. 아직 단단했다.
삼십오 년이 지났어도 이 숟가락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숟가락을 보자기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마당으로 나갔다. 논을 바라보았다. 가을 추수가 끝난 논이었다. 그루터기들이 남아 있었다. 이 그루터기를 내년 봄에 다시 갈아엎어야 하는데. 새 볍씨를 심어야 하는데. 그 생각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내년 봄에는 이 논에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문인수가 옆에 와서 섰다.
"아버지."
문장손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뭘 가져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해요."
문장손이 돌아보았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만강을 건너던 날 품에 안고 있던 볍씨에서 시작된 아이. 연해주의 차가운 밤에 그 우렁찬 울음소리로 세상에 나온 아이.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자신의 어깨만큼 키가 자란 아들.
"씨앗."
문장손이 말했다.
"뭐요?"
"볍씨 챙겨. 어디 가든 심어야지."
문인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았다. 두만강을 건너던 그 새벽의 눈빛이었다. 돌밭을 일구던 그 눈빛이었다. 군자금을 모으던 그 밤의 눈빛이었다. 꺾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알겠습니다."
열흘 후였다.
신한촌 사람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모였다.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화물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을 태우는 열차가 아니었다. 짐을 싣는 화물칸이었다. 소련 관헌들이 사람들을 그 화물칸에 밀어 넣었다.
문장손은 화물칸 앞에 서서 잠시 멈추었다.
이 칸에 오르면 연해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삼십오 년을 살아온 이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두만강 너머 조선 땅을 그리워하며 이 연해주를 제2의 고향으로 만들었는데, 이제 그 제2의 고향마저 잃는 것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하늘이 보였다. 연해주의 하늘이었다. 함경도 단천의 하늘과 닮아 있었다. 달랐지만 닮아 있었다. 이 하늘 아래서 볍씨를 심었다. 이 하늘 아래서 아들이 태어났다. 이 하늘 아래서 안중근 의사의 이름을 들었다. 이 하늘 아래서 조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하늘 아래서 삼십오 년을 살았다.

문인수가 옆에 섰다. 보자기를 꽉 쥐고 있었다. 그 안에 볍씨가 있었다.
문장손이 아들의 어깨를 짚었다.
"가자."
화물칸에 올랐다.
문이 닫혔다. 어두워졌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커덩, 철커덩. 바퀴가 철길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연해주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문장손은 보자기를 꽉 쥐었다.
놋쇠 숟가락이 손에 잡혔다. 차가웠다. 단단했다. 두만강을 건너던 날부터 삼십오 년을 함께한 그 숟가락이, 이제 또 다른 유랑의 길을 함께 가고 있었다.
철커덩, 철커덩.
열차는 서쪽으로 달렸다. 끝이 없는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중앙아시아의 붉은 황무지를 향해. 카레이스키의 두 번째 유랑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번째 유랑이 두만강의 차가운 강물에서 시작되었다면, 두 번째 유랑은 어둠 속 화물칸의 철커덩 소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볍씨는 살아 있었다. 문인수의 보자기 안에서, 카자흐스탄의 붉은 황무지를 향해 달리는 그 열차 안에서, 볍씨는 살아 있었다.
씨앗은 어디서든 살아남는다.
다음 회에서는 화물열차가 도착한 카자흐스탄의 황무지, 그 붉은 땅에서 문인수가 맨손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재외동포재단,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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