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레이스키 유랑사 007회] 붉은 황무지, 카자흐스탄의 첫겨울 1937년
바이라인: 조르바문
사람은 던져진 곳에서 산다.
선택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어디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듯, 어디로 던져질지도 선택할 수 없다. 스탈린의 명령서 한 장이 카레이스키를 중앙아시아의 붉은 황무지로 던졌다.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던져진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그것만큼은 선택할 수 있었다. 문인수는 그것을 알았다. 아버지 문장손에게서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열차가 멈춘 것은 스물다섯 날째 되던 날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지 거의 한 달이었다. 화물칸 안에서 한 달을 보냈다. 어둠 속에서 한 달을 버텼다. 처음 며칠은 사람들이 말을 했다. 어디로 가는지, 거기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러자 말이 줄어들었다. 열흘이 지나자 화물칸 안은 거의 조용해졌다. 철커덩 소리만 들렸다. 아이 우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 울다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문인수는 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다.
문장손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숨은 쉬었다. 가끔 보자기를 손으로 더듬었다. 놋쇠 숟가락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확인하고 나면 다시 눈을 감았다.
어머니 순이는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화물칸 안이 어두웠지만 순이의 얼굴은 보였다. 창백했다. 입술이 말라 있었다. 물이 부족했다. 기차가 가끔 멈출 때 소련 관헌들이 물을 조금씩 넣어주었다. 그것으로 버텼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가져온 것을 아껴 먹었다. 금방 떨어졌다. 배가 고팠다. 그러나 배고프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문인수는 창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끝이 없었다. 벌판이 끝이 없었다. 시베리아를 지나고, 어딘지 알 수 없는 벌판을 지나고, 또 벌판을 지났다. 나무가 없었다. 언덕도 없었다. 그냥 평평하고 끝없는 벌판이었다. 그 벌판이 무서웠다. 연해주의 벌판도 넓었지만 이것과는 달랐다. 연해주에는 산이 있었다. 바다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땅이었다. 그냥 하늘이었다. 그 사이에 열차가 달렸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열차가 멈춘 곳은 카자흐스탄의 어느 역이었다.
역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역이 아니었다. 허허벌판 가운데 철길이 있고, 그 옆에 낮은 건물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소련 관헌들이 화물칸 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었다. 눈이 따가웠다.
"내려."
사람들이 화물칸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문인수는 멈추었다. 땅이 달랐다. 연해주의 흙과 달랐다. 붉었다. 붉고 건조했다. 발밑에서 흙이 바스러졌다. 바람이 불었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었다. 10월이었는데 벌써 코끝이 얼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집도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길도 없었다. 그냥 붉은 황무지가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희끗한 것이 보였다. 눈인지 소금인지 알 수 없었다. 하늘은 높고 파랬다. 그 파란 하늘 아래 붉은 황무지. 그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한 아낙네가 주저앉았다. 땅바닥에 그냥 주저앉아 울었다. 소리 없이 울었다. 어깨만 들썩였다.
문장손이 그 옆을 지나다 멈추었다.
"일어나."
아낙네가 올려다보았다.
"앉아 있으면 더 춥소. 일어나서 움직여야 해."
그것이 문장손이 할 수 있는 위로였다.
소련 관헌들이 땅을 나눠주었다.
각 가정마다 땅 한 뙈기씩이었다. 거기에 집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집 지을 재료는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벽돌도 없었다. 그냥 황무지였다.
문인수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흙이었다. 발로 차보았다. 단단했다. 그러나 삽으로 파면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합니까?"
문장손이 삽을 들었다. 그리고 땅을 팠다.
"토굴이야. 땅을 파서 들어가 사는 거야."
토굴. 땅속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연해주에서 돌밭을 일구던 것처럼, 여기서는 땅속을 파야 했다.

문인수가 삽을 들었다.
팠다. 붉은 흙이 퍼올려졌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삽을 들고 팠다. 말이 없었다. 그냥 팠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바람이 더 차가워졌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얼었다. 움직여야 살 수 있었다.
저녁 무렵 토굴이 완성되었다.
사람 셋이 겨우 들어갈 크기였다. 지붕은 가져온 보자기와 천 조각으로 덮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차가웠다. 그러나 바깥보다는 나았다. 순이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장손이 들어갔다. 문인수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좁은 토굴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카자흐스탄의 첫 번째 밤이었다.
순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밥을 해야 하는데."
문인수가 가져온 쌀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물이 없었다. 불을 피울 나무도 없었다.
"내일 구하지."
문장손이 말했다.
"오늘 밤은?"
"버티는 거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만 들렸다. 문인수는 보자기를 꽉 쥐었다. 그 안에 볍씨가 있었다. 아버지가 챙기라고 한 볍씨였다. 이 붉은 황무지에서 이 볍씨를 심을 수 있을까. 이 땅에서 벼가 자랄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심어봐야 알 수 있었다. 심지 않으면 영원히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내일 할 일이었다.
첫 번째 겨울은 혹독했다.
카자흐스탄의 겨울은 연해주의 겨울보다 달랐다. 눈은 적었다. 그러나 바람이 달랐다. 중앙아시아의 벌판을 가로질러 오는 바람은 막아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산도 없고 나무도 없는 황무지에서 바람은 그냥 달려왔다. 토굴 안까지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죽었다.
노인들이 먼저 갔다. 아이들도 갔다. 추위와 굶주림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한 몸이 카자흐스탄의 겨울을 버티지 못했다. 신한촌에서 함께 살던 얼굴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간밤에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문장손은 버텼다.
이미 늙은 몸이었다. 오십 중반이었다. 그러나 버텼다. 문인수가 매일 눈을 뜨면 아버지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순이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침 두 사람의 숨소리를 확인하는 것이 문인수의 첫 번째 일이었다.
봄이 오기 전에 문장손이 문인수를 불렀다.
기침이 심해진 뒤였다. 토굴 안에 누워 있었다. 문인수가 옆에 앉았다.
"볍씨 있지?"
"있습니다."
"봄에 심어. 이 땅에서도 자라. 연해주 땅보다 더 힘들겠지만 자라."
"어떻게 압니까?"
문장손이 문인수를 바라보았다.
"씨앗은 어디서든 자라. 내가 단천에서 가져온 볍씨가 연해주 돌밭에서 자랐잖아. 여기서도 자라."
문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장손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것."
보자기에서 놋쇠 숟가락을 꺼냈다. 문인수의 손에 쥐여주었다.
"할머니 것이야. 단천에서 가져온 거야. 두만강 건널 때도 가져왔어. 여기까지 왔어. 네가 가져가."
문인수는 숟가락을 받았다. 차가웠다. 단단했다.
"아버지."
"봄에 씨앗 심어. 그게 전부야."
문장손은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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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첫 번째 겨울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봄이 오기 한 발 앞에서였다. 문인수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옆에 앉았다.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문장손. 1880년대생. 함경도 단천에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뿌리를 내리고, 스탈린의 명령서 한 장에 카자흐스탄의 황무지로 던져져, 그 붉은 땅의 첫 번째 겨울에 눈을 감은 사내. 카레이스키 1대.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놋쇠 숟가락은 이미 아들에게 넘어갔다. 볍씨도 아들의 보자기 안에 있었다. 그는 가져온 것을 모두 넘겨주고 갔다.
순이가 울었다.
소리 없이 울었다. 문인수는 울지 않았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울면 안 됐다. 아버지가 없는 지금부터는 자신이 버텨야 했다. 어머니를 지켜야 했다. 볍씨를 심어야 했다.
봄이 오면 씨앗을 심어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것이 카레이스키 1대가 2대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땅을 파서 묻었다. 카자흐스탄의 붉은 흙이 문장손을 덮었다. 두만강의 강물도 연해주의 흙도 아닌, 낯선 중앙아시아의 붉은 땅이 그를 받아들였다. 문인수는 봉분을 만들었다. 손으로 흙을 다졌다. 그리고 일어섰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봄이 오면 씨앗을 심어야 했다.
다음 회에서는 카자흐스탄의 봄, 문인수가 붉은 황무지에 볍씨를 심던 날과 그 땅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씨앗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및 카자흐스탄 정착 역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재외동포재단,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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