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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시멘트마당에서 쓰는 카레이스키

[카레이스키 유랑사 003회] 신한촌의 봄, 뿌리가 내리다 1903년

by Zorbamoon 2026.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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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 유랑사 003회] 신한촌의 봄, 뿌리가 내리다 1903년

 

바이라인: 조르바문

사람은 어디서든 뿌리를 내린다.

흙이 척박할수록, 바람이 매서울수록, 뿌리는 더 깊이 파고든다. 연해주의 땅은 조선의 땅과 달랐다. 돌이 많았고, 흙이 거칠었고, 겨울이 길었다. 그러나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은 그 땅에서도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었다. 뿌리를 내렸다. 조선에서는 빼앗기기만 했던 것들을, 이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카레이스키의 시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신한촌이 있었다.

1903년 여름, 문장손이 처음 그 마을 어귀에 섰을 때, 그는 잠시 발을 멈추었다. 조선말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두만강을 건넌 이후 처음으로 듣는 제 나라 말이었다. 아낙네가 우물가에서 아이를 나무라는 소리였다. 사내들이 밭두렁에서 서로 부르는 소리였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 목소리들이 귀에 닿는 순간 문장손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뜨거워졌다.

참았다.

 

신한촌은 생각보다 컸다. 초가집과 귀틀집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고, 마을 가운데로 좁은 길이 나 있었다. 길 양옆으로 조선에서 가져온 것들이 보였다. 된장독, 장독대, 마당 한편에 심어둔 고추나무. 낯선 연해주 땅 위에 조선의 살림살이가 그대로 옮겨와 있었다. 그것들을 보는 순간 문장손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슬픔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그를 처음 맞은 것은 최서방이었다.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연해주에 온 지 십 년이 넘었다는 그 사내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얼굴에는 오랜 햇볕과 바람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눈이 깊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왠지 오래 알아온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왔나?"

"단천입니다."

"함경도군. 언제 건넜어?"

"사흘 전입니다."

최서방은 문장손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어보았다. 젖은 발, 닳아빠진 신발, 등에 짊어진 낡은 보자기. 그리고 그 눈빛. 꺾이지 않은 눈빛.

"일할 수 있나?"

"하러 왔습니다."

최서방이 짧게 웃었다.

"따라와."

 

 

최서방이 내준 땅은 마을 북쪽 끝자락이었다.

첫 삽을 들었을 때 쇠 삽날이 돌에 부딪혀 튕겨났다. 손이 저렸다. 다시 삽을 들었다. 또 튕겨났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돌을 집어냈다. 주먹만 한 돌, 어른 머리만 한 돌, 납작한 돌, 뾰족한 돌. 하루 종일 돌만 골라냈는데 걷어낸 돌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래도 땅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터졌다. 다시 잡혔다. 두만강을 건너던 발처럼, 손도 그렇게 단단해졌다.

일주일이 지나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와서 거들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삽을 들고 옆에서 팠다. 함께 돌을 골랐다. 점심때가 되면 누군가 밥을 가져왔다. 조선 된장으로 끓인 국이었다. 연해주 땅에서 먹는 된장국은 단천 어머니가 끓여주던 그 맛과 달랐다. 그러나 뜨거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네, 쉬지도 않나?"

최서방이 어느 날 저녁 물었다.

"쉬면 생각이 납니다."

"뭐가?"

"고향이요."

최서방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게 웃었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 십 년 지나면 여기가 고향 돼. 이 흙이 내 흙이 돼."

문장손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때는.

 

 

신한촌의 밤은 낮과 달랐다.

낮에는 저마다 일했다. 밭을 갈고, 나무를 하고, 집을 고쳤다. 그러나 밤이 되면 사람들이 마을 한가운데로 모였다. 모닥불을 피웠다. 조선말로 이야기를 나눴다. 함경도 사람, 평안도 사람, 황해도 사람. 사투리가 달랐지만 말이 통했다. 조선에서는 한 번도 한자리에 모인 적 없는 사람들이 연해주 땅에서 이웃이 되었다.

누군가 노래를 불렀다. 함경도 민요였다. 문장손은 노래를 모른 척했다. 그러나 멜로디가 귀에 스며드는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참았다. 사내가 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최서방이 문장손을 조용히 불렀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으로 데려갔다. 방 안에 남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모두 눈빛이 달랐다. 형형했다. 뭔가를 품고 있는 눈빛이었다.

"자네를 믿을 수 있나?"

최서방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문장손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독립군 군자금이야. 조선에 있는 의병들한테 보내야 해. 일본 놈들 눈을 피해서."

방 안이 조용했다. 모닥불 타는 소리만 들렸다.

문장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그 두 글자가 문장손의 삶을 바꾸었다. 낮에는 밭을 일궜다. 볍씨를 심고 물을 댔다. 척박한 연해주 땅을 조선의 논으로 바꿔나갔다. 그러나 밤에는 달랐다. 군자금을 모았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게 돈을 맡겼다.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총이 되고, 총알이 되고, 의병의 밥이 된다는 것은 알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

문장손이 단천에서 가져온 볍씨가 벼가 됐다. 황금빛으로 익은 벼이삭이 연해주의 서늘한 바람에 흔들렸다. 돌투성이 땅을 손으로 일궈서, 두만강 건너 품에 안고 온 볍씨를 심어서 거둔 첫 수확이었다.

문장손은 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바라보았다. 황금빛 이삭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저 멀리 연해주의 지평선 위로 석양이 번지고 있었다.

최서방이 옆에 와서 섰다.

"믿겠나? 이 땅에서 이런 게 나올 줄."

문장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여기도 살 수 있겠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최서방도 모른 척했다. 연해주의 저녁 바람이 두 사내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카레이스키 1대의 뿌리가 내리는 순간이었다. 문장손의 볍씨가 연해주의 돌밭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카레이스키의 씨앗이 이 낯선 땅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씨앗은 이후 120년 동안,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어떤 권력이 짓밟아도, 끝내 죽지 않는다.

다음 회에서는 신한촌을 중심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독립운동의 불꽃과, 안중근 의사의 그림자가 연해주 땅에 드리우던 그 시절을 따라갑니다.

※ 이 소설은 실화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입니다. 연해주 신한촌 및 고려인 이주 역사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및 재외동포재단 공식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자유의 영혼 조르바문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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