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옥탑방 시멘트마당에서 쓰는 카레이스키20 [카레이스키 유랑사 021회] 조선말로 말하다, 1995년 봄 [카레이스키 유랑사 021회] 조선말로 말하다, 1995년 봄 바이라인: 조르바문 말에는 온도가 있다. 러시아어는 차갑고 정확하다. 한국말은 낯설고 서툴다. 그러나 조선말은 다르다. 집 안에서 쓰는 말이다. 아버지가 밤마다 들려주던 이야기의 말이다. 어머니가 자장가를 부르던 그 말이다. 할머니가 연해주를 그리워하며 중얼거리던 그 말이다. 조선말로 하는 말은 뿌리에서 나온다. 그래서 드미트리는 나디아에게 조선말로 말하기로 했다. 이 말만큼은 조선말로 해야 했다. 1995년 봄이었다. 안산에 온 지 세 해가 지났다. 창가의 화분에서 싹이 트고, 그 싹이 초록이 되고, 겨울을 나고, 봄이 다시 왔다. 드미트리의 볍씨와 나디아의 볍씨가 나란히 창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두 화분이었다. 드미트리가 자신의 볍씨를 심.. 2026. 6. 26. [카레이스키 유랑사 020회]창가의 싹, 1994년 겨울 [카레이스키 유랑사 020회]창가의 싹, 1994년 겨울바이라인: 조르바문 싹이 트는 것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어제까지 흙이었던 자리에 오늘 아침 하얀 것이 올라와 있다.아무도 보지 않은 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 하얀 것이 올라오기까지 흙 아래에서 씨앗이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어둠 속에서, 차가운 흙 속에서, 혼자서 버티고 버티다가 어느 순간 밀고 올라오는 것이다. 문드미트리가 안산 고시원 방 창가에 볍씨를 심은 것은 1994년 가을이었다.그리고 첫 번째 싹이 올라온 것은 그해 겨울이 시작되던 어느 아침이었다.드미트리는 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창가를 보는 버릇이 생겨 있었다. 볍씨를 심은 날부터 그랬다.눈을 뜨면 먼저 창가를 보았다. 화분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흙만.. 2026. 6. 26. [카레이스키 유랑사 019회]아버지의 편지, 1994년 가을 [카레이스키 유랑사 019회] 아버지의 편지, 1994년 가을바이라인: 조르바문 편지는 손으로 쓴 것이다.전화도 아니고 전보도 아니고 손으로 쓴 것이다.손으로 쓴 글씨에는 목소리가 담긴다. 볼펜을 눌러쓴 힘이 담긴다. 쓰다가 멈춘 자리가 담긴다. 고쳐 쓴 흔적이 담긴다.그래서 편지는 읽는 것이 아니다.만나는 것이다. 문드미트리가 카자흐스탄 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은 것은 1994년 가을이었다. 안산의 고시원 방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카자흐스탄 소인이 찍힌 봉투였다. 드미트리는 그 봉투를 보는 순간 발걸음이 멈추었다.아버지의 글씨였다.드미트리는 방으로 올라갔다.봉투를 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서두르지 않았다. 이 봉투를 빨리 뜯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이 편지를 쓰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 2026. 6. 26. [카레이스키 유랑사 018회] 안산 골목의 인연, 1994년 봄 [카레이스키 유랑사 018회] 안산 골목의 인연, 1994년 봄바이라인: 조르바문 인연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부딪히는 것이다. 준비하지 않은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골목에서, 아무 계획도 없이 걷다가 부딪히는 것이다. 문장손이 신한촌 우물가에서 박순이와 눈이 마주쳤던 것처럼. 문인수가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에서 류드밀라를 만났던 것처럼. 문빅토르가 콜호스에서 나탈리아를 알게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문드미트리가 안산의 좁은 골목에서 그 여인을 만난 것처럼. 카레이스키의 인연은 언제나 그렇게 왔다. 소리 없이, 예고 없이, 그러나 필연처럼. 1994년 봄이었다.안산에 온 지 두 해가 지났다.드미트리는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한국말이 늘었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더듬거렸다. 그러나 공장 동료들과 기본적.. 2026. 6. 26. [카레이스키 유랑사 017회] 차가운 시선, 뜨거운 뿌리 1993년 안산 [카레이스키 유랑사 017회]차가운 시선, 뜨거운 뿌리 1993년 안산바이라인: 조르바문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그러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바람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뿌리 깊은 나무도 바람이 불면 흔들린다. 가지가 흔들리고 잎이 흔들린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는다. 뿌리가 땅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문드미트리가 안산에서 버틴 것이 그랬다. 흔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흔들렸다. 매일 흔들렸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았다. 증조할아버지의 뿌리가, 할아버지의 뿌리가, 아버지의 뿌리가 그를 붙들고 있었다. 안산에 온 지 여섯 달이 지났다.1993년 가을이었다. 드미트리는 조금씩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았다. 아직 더듬거렸다. 그러나 공장 안에서 필요한 말들은 할 수.. 2026. 6. 24. [카레이스키 유랑사 016회]안산 공단의 첫 번째 새벽, 1992년 [카레이스키 유랑사 016회]안산 공단의 첫 번째 새벽, 1992년바이라인: 조르바문낯선 땅에서의 첫 번째 새벽은 언제나 차갑다.연해주의 첫 번째 새벽이 그랬다. 카자흐스탄의 첫 번째 새벽이 그랬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첫 번째 새벽도 그랬다. 차갑다는 것은 온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는 얼굴이 없다는 것, 익숙한 소리가 없다는 것,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차갑다. 그러나 카레이스키는 그 차가움을 알았다. 대를 이어 그 차가움을 버텨왔다. 문드미트리도 그것을 알았다. 두만강의 차가운 강물 속을 걸어간 증조할아버지의 피가 자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박성호가 공항에 나와 있었다.드미트리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긴장이 풀렸다. 알마티 시장 골목에서 처음 만났던 그 사람이었다. 서.. 2026. 6. 21.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